세종 25년(1443)은 하위지가 27세 되는 해인데, 10월 27일 세종이 공법의
시행 여부를 묻는데서 하위지가 집현전 수찬(정6품)으로 진급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해인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성을 상소할때 하위지는 집현전 부교리(종5품)가 되어
이에 동참한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0일에는 집현전에서 "오례의"의 주해를 상세히
내라는 왕명을 받는데 하위지가 이 일을 주관하게 된다.

세종 28년(1446)은 하위지가 30세 되는 해인데 3월 24일 세종 왕비
소헌왕후 청송심씨가 52세로 돌아간다.

이에 세종은 1년동안 상복을 입겠다는 신하들의 주장이 옛 상제에 맞는지
여부를 하위지에게 상고하여 아뢰라 한다.

하위지가 집현전 학사들중에서 예법에 가장 밝았기 때문이었다.

3월 26일 하위지가 옛 상제를 상고하여 아뢰니 세종은 이를 근거로 하여
왕세자와 대군제군은 3년동안 흰옷과 검은 뿔띠(백의흑각대)로 상복을 입고,
신하들은 1년동안 흰옷과 검은 뿔띠로 상복 입는 것을 법제화한다.

그리고 이날 세종은 동궁과 대군들이 모후를 위해 사경불사를 봉행할 것을
청하자 이를 허락한다.

이에 하위지는 사헌부 집의 정창손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일축하고 만다.

3월 27일 세종은 3년 상제를 다시 생각해야겠다는 전지를 내리는데, 이는
정자와 주자가 부친 생존시에 모친이 별세하면 기년복, 즉 1년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를 따라야 하고, 뿐만 아니라 태종이 세종의 모후인 원경왕후
민씨가 돌아갔을 때 세종으로 하여금 기년복을 입게 하여 만세에 전해야 할
법으로 삼았으니 이를 준수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위지에게 옛 상제를 상세히 상고하여 아뢰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3월 28일 하위지가 옛 상제를 자세히 상고하여 아뢰니, 세종은 이를 바탕
으로 부친 생존시에는 모친을 위해 기년복을 입되 흰옷을 벗고 나서는 심상
3년을 위해 천담복(옅은 옥색옷)으로 3년을 지내게 하도록 상제를 고친다.

그런데 이 사이 하위지 집안에는 큰 환란이 닥쳐 있었다.

하위지의 형인 하강지가 동복현감으로 내려가서 고을살이를 하다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백성의 처를 간음하고 쌀과 벼를 함부로 거둬들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자 하강지는 우선 몸을 피하면서 모면할 방책을 강구하기 위해 서울로
달려왔던 모양인데 이것이 더욱 문제가 되어 9월 3일 사헌부에서 다음과
같이 상소한다.

"동복현감 하강지는 부민의 처를 간통하여 마음대로 음욕을 채우고 쌀과
벼를 거둬 들이고는 마침내 간 곳이 없었는데 추핵을 당하기에 이르자
서울로 도망해 왔으니 간사하고 탐욕하기가 이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역마로 내려보내어 그 도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게 전지하시기를 빕니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니 그 아우들인 집현전 교리(정5품) 하위지와 봉상시
직장(종7품) 하기지가 함께 사직하고 따라가서 친히 칼과 족쇄를 잡고 송사
하는 법정에 출입하기를 거의 1년이나 하게 된다.

세종이 하위지와 하기지 형제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던 듯 이 해 12월
15일 집현전 교리 하위지는 형 하강지의 억울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상소
한다.

"신의 형 하강지가 동복현감이 되었을때 고을 사람인 송중의가 형에게
감정이 있어 도사 원자직에게 호소하니 자직 역시 묵은 혐의가 있어 수령을
지휘해 부추겨서 여러가지 가혹한 형벌로 얽어서 죄를 만들었으니 청컨대
다시 사실을 검열해 주십시오"

세종은 이를 형조에 보내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 어름에 박팽년도 그 부친 박중림이 노비 김삼의 아들 김산의 친자 시비
문제에 얽혀들어 의금부에 갇히는 환난을 만나 12월 18일에는 그 부친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세종께 올린다.

이때 세종은 참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친자식처럼 극진히 사랑하며 길러내고 있는 집현전의 중심인물들이 각기
그 부형의 실수로 당당한 위풍에 손상을 입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 부형의 죄를 감면하여 그 사기를 높여주고 싶었겠으나
죄증이 확실하여 놓아줄 방도가 없게 되었으니 오죽 답답하였겠는가.

오히려 그들의 죄를 분명하게 다스리는 것이 저들의 체면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하고 추호의 사정도 두지 않고 엄벌로 다스린다.

이에 하위지는 세종 29년(1447) 4월 17일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한다.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잘못 시종의 자리를 더럽히며 지나치게
성은을 입었으니 스스로 보답할 길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병인년(1446) 9월에 형 강지가 병을 품고 남쪽 변방으로 옥살이를 감으로
사직하고 부축하여 가기를 빌었더니 본직으로 역마를 타고 함께 가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얼마 안되어 형의 병이 더욱 위독하고 아우 기지가 또 죽어서 또 사직하며
병을 구원하고 상사 돌보기를 빌었더니 또 역마를 타고 가서 구원하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전후에 베푸신 이런 특수한 사정은 지금이나 예전에 없던 바입니다.

돌아보건대 무슨 작은 공로라도 있기에 이런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외람
되게 입겠습니까.

밤중에 일어나면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립니다.

상사환난에 당도하면서부터 여러 달이 지나니 대궐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신하의 정성이 아침저녁으로 더욱 간절하기만 합니다.

다만 속으로 스스로 생각해 보니 신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오직 형이
의지처이기에 우러러 아비로 여기었는데 이제 죄수로 갇힌데다 질병까지
더해 있습니다.

기지는 생명을 버리어 그에 보답하였으니 몸은 비록 이미 갔으나 땅속
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버리고 가서 반열에 나아간다면 인정에 차마 하지 못할 바이고,
헛되이 벼슬만 띠고 오래 외방에서 날을 보낸다면 또한 깊이 황공한지라
진퇴에 궁박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위태롭고 간절한 정상을 불쌍히 여기시어 벼슬살이하는
일을 파면해 주십시오"

세종은 하위지의 환난을 모른체 할 수 없어 이를 허락하고 만다.

그래서 하위지는 이 해 8월 18일에 치러지는 문과중시에 응시하지도 못한다.

하위지는 11월 16일에 다시 상소하여 자신이 형 대신 종이를 다듬이질하는
도침형의 중노동형을 살 터이니 형을 사면해 달라는 간절한 뜻을 세종께
아뢰나 세종이 그 청을 들어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형제간의 정리가 이에 이르면 족하다고
할만 하다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제 그 상소의 일단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의 형 강지가 지금 법에 걸려 유배를 당하였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신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신과 과부된 누님과 어린 아우및 어린 누이가
모두 강지를 우러러 아비로 삼고 살았었습니다.

또 강지는 신의 일가에 종손이 되어 신의 부조의 제사를 받드니 분묘와
신령이 기탁하는 곳입니다.

이제 만약 먼 땅으로 유배된다면 자매 형제가 우러러 기댈 데가 없고,
부조의 신령이 의지할 주인이 없어 종통이 끊어지고 집안이 깨어져서 문호가
쓸어낸 듯 할 터이니 신의 생각이 여기에 이름에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여 심신이 어두워져 나갈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원하건대 이름을 삭제하여 도작(노역형에 처한 죄수)으로 삼고 형
강지를 따라 도침에 영속시켜 그것으로 형의 유배를 속죄하게 해 주십시오.

(중략)

다만 생각하건대 몸이 자기 소유가 아니거늘 사사로이 제명하기를 비니
신자는 오직 나라가 있을 뿐이라는 의리에 위배됨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나라에 큰 환난이 있으면 대신이 그에 당하고 집안에 큰 환난이 있으면
자제가 그에 당하여 오직 그 있는데 따라 죽음에 이를 뿐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신에게 문호의 환난이 지극히 참담하고 지독하여 아우 기지는 전년에
사직하고 호남으로 달려 내려가서 형을 구원하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죽고 오직 신만 홀로 남아 다른 위탁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신이 만약 머뭇거리며 그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부형의 은혜를 배반하고
죽은 아우의 소망을 저버려서 먼저 국가에 보답하는 근본을 잃을 터이니
국가가 장차 그것을 어디에 쓰겠으며 신이 다른 날에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제영(몸을 관비로 바쳐 부친의 죄를 대속하려 하였던 한 문제시의 효녀)을
보겠습니까"

이로 보면 하위지의 아우인 봉상시 직장 하기지는 세종 28년 9월에 장형
하강지를 따라 전라도에 가서 병구완을 하다가 도리어 병을 얻어 죽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뒷날 이 사실을 모르고 하기지도 세조 원년(1456) 병자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피살된 것으로 오인하여 정조 15년(1791) 2월 21일 장릉
배식단에 배향하는 인물 중에 성균관 학유 하기지를 포함시키고 있으며
"진양하씨세보" 권1 하기지 조에서도 병자년에 하위지와 함께 피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로잡아야 할 사실이다.

하기지가 비록 임금을 위해 죽은 것은 아니지만 형을 간병하다 죽었으니
충의의 기준으로 보면 큰 차이는 없다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위지 형제가 집안에서부터 목숨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효와 의를
철저하게 지켰었기 때문에 장차 임금과 나라를 위해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 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위지가 다시 조정에 출사하는 것은 세종 30년(1448) 5월 9일의 실록기사
로 확인할 수 있으니 그가 32세 되는 해였다.

그래서 세종 31년(1449) 2월 5일 춘추관에서 "고려사"를 고쳐 편찬하는
일을 의논할때 하위지도 사관으로 그 개찬방법에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마땅히 유교사관에 입각한 정사체인 기전체로 편찬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고려사"는 기전체로 편찬되기에 이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