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시절에 복리후생비가 다 뭡니까.

그저 내쫓기지 않고 일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요"

직장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추운 겨울이 예고되고 있다.

기업의 잇단 도산과 감량경영으로 마음 졸이던 샐러리맨들은 올
연말연시를 그야말로 "썰렁하게" 보낼 전망이다.

차마 월급을 깎지는 못하지만 각종 수당이나 복리후생비를 줄여서라도
살아남겠다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중견 무역회사에서 화학제품을 수입, 판매하는 L과장.

바이어를 만나고 접대하는게 일상업무이지만 그는 지난달 이후 판공비를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꼭 필요한 경비만 사전에 승인을 받고 집행하라는 회사지침을 따르기
위해서다.

"지금은 접대비를 쓰라고 해도 못쓰는 형편입니다.

환차손때문에 물건을 팔수록 손해를 보다보니 영업활동이고 뭐고 아예 손을
놔버렸습니다"

L과장은 최근 내년도 예산계획서를 작성, 담당중역에게 올렸다.

잦은 환율변동으로 고치고 다시 고치기를 4번째.

새 계획서에는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을 위해 떼어놓던 "직원선물비"
항목이 아예 빠져 버렸다.

자금압박을 받고 있는 A그룹 기획실의 K부장은 요즘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있다.

회사에서 지원해주던 차량유지비 주차비 등이 모두 없어지면서부터다.

핸드폰 삐삐 등 통신기기들도 장비는 회사가 사주지만 사용료는 본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K부장은 "연초부터 각종 원가절감운동을 통해 경비를 최대한 줄여왔는데
여기서 더 줄이라니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라며 "그래도 급여를 자진 삭감한
임원들이나 직장을 떠난 동료들에 비하면 행복한 처지"라고 말했다.

마른 수건을 한 번 더 쥐어짜는 초긴축경영에 대기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삼성전자는 올해초 영어 일본어 등 사외어학교육에 대한 지원금을
없앴으며 명절때의 선물단가도 평균 20만원선에서 6-7만원으로 낮췄다.

최근에는 격주휴무제를 전사로 확대했으며 개인 차원의 접대비 지출도
금지시켰다.

현대건설은 사원들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지급하던 선물이나 콘도 호텔
등의 무료숙박권을 대폭 축소했다.

LG전자는 작년보다 복리후생비를 20% 가량 감축키로 하고 노조와
협의중이다.

(주)대우는 중역들에게 업무용 차량을 지원해왔으나 최근 이를 없애고
소정의 차량유지비를 지급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다 쓴 사무용품을 총무팀에 제출해야 새 것을 바꿔주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이고 있다.

경비절감은 점심식사의 풍속도도 바꿔놓았다.

예전같으면 직장인들로 흥청거리던 서울 태평로 식당가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모두가 밥값이 싼 구내식당으로 몰려가기 때문이다.

인근의 한 직장인은 "답답한 마음에 차라리 해외근무를 지원해볼까
생각하지만 주재원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본사 지원금은 줄어들지 환율은 뛰지. 정말 출구가 안보입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같은 "실질임금의 감봉"에 반발하는 샐러리맨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어떻게든 이 고비만은 넘겨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다.

"지금은 회사나 임직원 모두가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할 때입니다.

최근의 초긴축경영마저 실패하면 기업의 도산이나 대량해고 등 파국밖에
남는게 없습니다"라는게 불황시대 직장인들의 한목소리다.

<이영훈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