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발생한 박나리양 유괴살해사건은 파산을 죄악시하는 사회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현재 재판이 진행중인 전현주씨는 신용카드로
진 빚을 해결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검찰수사결과 밝혀졌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인 김영호판사는 "이는 파산신청제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소비자파산은 과소비사회가 거품을 빼기 위해서 한번은
치뤄야 할 사회적 비용"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거품경제가 사라진 80년대 후반부터 자기파산신청이 급증,
지난해에만 6만건을 돌파했으며 이중 90%이상이 소비자 파산이었다.

미국은 지난 한해동안 무려 1백11만4천여명이 더이상 빌린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선포"했다.

카드업계가 파산선고가 내려진 채무자에 대해서도 소득규모에 따라 부채를
계속해서 갚도록 개인파산법의 개정을 촉구할 정도다.

선진국에서는 이와같이 파산상태에 빠진 개인이 자살이나 강.절도와 같은
반사회적 범죄가 아닌 소비자파산제도라는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부도상태에 빠진 기업들이 화의나 법정관리를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비자 파산의 절차와 처리과정을 파산법에 명시하고 있다.

법원은 채무자가 전체부채액수와 재산규모, 파산에 이르게된 경위와 빚을
갚기위한 노력, 가족들의 재산상황및 연소득 등을 기재해 신고할 경우 파산
선고를 내리게 된다.

또 채무자가 파산결정이후에도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채무를 완전면제시키는 면책신청절차를 두고 있다.

면책결정을 받으면 채무에 대한 완전면제와 동시에 파산선고로 박탈당한
경제권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법조계는 그러나 소비자파산의 남용을 막고 파산선고로 인한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법조계는 지적
하고 있다.

금융기관이 신용거래자의 상환의사와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신용정보에
대한 조사, 분석 및 평가작업이 보다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연합회는 각 은행컴퓨터시스템을 통신망을 연결, 고객의 신용정보등록
및 해지를 리얼타임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각 금융기관간의
고객정보 공유에 대한 폐쇄적인 태도는 이러한 시스템의 효율적인 사용을
가로막고 있다.

또한 매출상승을 위한 신용카드의 남발이나 채무자나 보증인의 신용상태에
대한 별다른 조사없이 이뤄지는 대출관행은 여전히 잠재적인 파산자를 양산
하고 있다.

IMF시대에 걸맞는 합리적인 금융시스템과 합리적인 소비생활이 요구되는
이유다.

< 이심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