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모임] 이회식 <경기대 산업공학과 교수> .. '동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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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전까지만 해도 우린 몰랐다.
이 넓은 서울땅에 그 산골 친구들이 이렇게 많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로 모르고 살았다.
국화빵 한두개 사먹는 일은 그래도 읍내에 살았던 아이들의 주머니 사정일
뿐 5km 등교길을 오가며 나락이삭 뽑아 먹고 배추뿌리 깎아먹으며 갑자기
생긴 여드름에 놀라던 그때 그 아이들이 졸업한지 내년이면 40년이 된다.
우리 동산회는 경북 군위중학교 제9회 졸업생(1958년 졸업)들로 서울에
살고 있는 24명의 남녀 친구들이다.
전체 졸업생이 2백명도 못되었으니 꽤 많은 숫자다.
6.25 전쟁 중에는 불탄 초등학교 가교사에서 가마니 깔고 공부했고 6학년
때는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하느라 촛불 켜놓고 밤늦도록 학교에서 같이 공부
했던 고향 친구들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예쁜 그림 새겨진 고운 종이(그땐 이것을 사인지라고
했다)를 서로 교환하며 "다시 만날 때까지"라든가 "친구여 영원히" 등의
문구와 함께 이름인지 사인인지를 서로 교환하며 까만 눈을 마주보던 그런
친구들이다.
우린 2개월에 한번씩 만난다.
서울 시내에서 저녁 한끼 또는 소주 몇잔이 전부지만 내키면 노래방에도
간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우리 김이부 회장의 애창곡은 "나그네 설움"이고
필자는 "울고 넘는 박달재"가 단골 메뉴다.
많지 않은 우리 동산회지만 흘러간 세월 만큼이나 하는 일도 다양하다.
사장님들이 가장 많고 특히 경영학박사(김길생) 국문학박사(홍경표)
교육학박사(김용조)들은 수십년의 세월이 일궈낸 보석들이다.
해마다 대구에 있는 동산회 친구들과 상호 초청 동창회를 교대로 갖는데
금년에는 서울 친구들이 대구 친구들을 제주도로 초청했고 내년에는 대구
에서 다시 만난다.
서울에서만도 벌써 두 친구가 먼저 갔는데 그저 건강하게 살면서 반가운
얼굴들을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만날 때마다 나누는
소박한 욕심들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
이 넓은 서울땅에 그 산골 친구들이 이렇게 많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로 모르고 살았다.
국화빵 한두개 사먹는 일은 그래도 읍내에 살았던 아이들의 주머니 사정일
뿐 5km 등교길을 오가며 나락이삭 뽑아 먹고 배추뿌리 깎아먹으며 갑자기
생긴 여드름에 놀라던 그때 그 아이들이 졸업한지 내년이면 40년이 된다.
우리 동산회는 경북 군위중학교 제9회 졸업생(1958년 졸업)들로 서울에
살고 있는 24명의 남녀 친구들이다.
전체 졸업생이 2백명도 못되었으니 꽤 많은 숫자다.
6.25 전쟁 중에는 불탄 초등학교 가교사에서 가마니 깔고 공부했고 6학년
때는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하느라 촛불 켜놓고 밤늦도록 학교에서 같이 공부
했던 고향 친구들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예쁜 그림 새겨진 고운 종이(그땐 이것을 사인지라고
했다)를 서로 교환하며 "다시 만날 때까지"라든가 "친구여 영원히" 등의
문구와 함께 이름인지 사인인지를 서로 교환하며 까만 눈을 마주보던 그런
친구들이다.
우린 2개월에 한번씩 만난다.
서울 시내에서 저녁 한끼 또는 소주 몇잔이 전부지만 내키면 노래방에도
간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우리 김이부 회장의 애창곡은 "나그네 설움"이고
필자는 "울고 넘는 박달재"가 단골 메뉴다.
많지 않은 우리 동산회지만 흘러간 세월 만큼이나 하는 일도 다양하다.
사장님들이 가장 많고 특히 경영학박사(김길생) 국문학박사(홍경표)
교육학박사(김용조)들은 수십년의 세월이 일궈낸 보석들이다.
해마다 대구에 있는 동산회 친구들과 상호 초청 동창회를 교대로 갖는데
금년에는 서울 친구들이 대구 친구들을 제주도로 초청했고 내년에는 대구
에서 다시 만난다.
서울에서만도 벌써 두 친구가 먼저 갔는데 그저 건강하게 살면서 반가운
얼굴들을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만날 때마다 나누는
소박한 욕심들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