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은 이처럼 신미의 존호에 대한 반대 상소가 그치지 않자 즉위년 8월
7일에 드디어 다시 한번 조정인사를 개편하면서 신미의 존호를 대조계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승양조도 체용일여 비지쌍운 도생이물 원융무애
혜각종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국이세라는 한 구절을 빼는 대신 승양조도 체용일여 도생이물의 3구절을
더 첨가하였던 것이다.

이때 박연(1378~1458)은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징옥은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성득식은 이조참의가 되었었다.

그런데 하위지는 이 인사개편이 발표되자마자 이 인사개편이 고르지
못하다고 그 날로 즉시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김신행은 지난해 초고로 외임에서 갈리어 와 이제 돌도 못채웠는데 또
지태안군사를 시켰고 지정(?~1435)은 겸판이조사 정분(?~1454)의 생질이라
분에게서 상피(친족이나 기타 긴밀한 관계가 있어 벼슬자리에 서로 영향주는
것을 피하는 것)가 되는데 판사복시사를 시켰으니 모두 법에 어긋납니다.

삼관(예문관 춘추관 성균관)에서 윗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지난해 초고가
중이면 법에는 응당 같은 품계의 다른 관청으로 옮겨 줘야 하거늘 이조가
즉시 제수하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예문관 봉교 이효장은 곧 부사직에 임명
하고 성균박사 김위는 곧 교수관에 임명하며 교서랑 진유경은 곧 행참군에
임명하니 그 벼슬 주는 것이 또 고르지 못합니다. 청컨대 이를 고치십시오"

문종은 이에 대해 이렇게 변명한다.

"지정은 아래에서 계청한 것이 아니라 특지였으며 김신행은 무과 출신으로
사람의 그릇됨이 그 벼슬에 합당하고 삼관의 일은 그때 이조에서 아뢰었으나
자리가 부족했었다. 내가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문종실록은 다시 하위지의 인물평을 곁들이고 있다.

"하위지는 순수하고 정직하며 공정할 뿐 사익을 잊으니 세종조에 있어서
매양 항의하는 상소로 폐단을 말하여 대우가 심히 융성하였었다.

주상이 즉위하자 직집현전으로 윤대(매월 세번씩 각부의 낭관이 차례로
임금을 알현하고 직무에 대하여 상주하던 일)함에 해가 기울어서야 나가니
주상이 아름답게 여겨 연일 입대하게 하였다"

9월 19일 우찬성 정분을 충청.전라.경상 3도 도체찰사로 삼아 각읍의 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자 하위지는 9월 23일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며
전례대로 각도 감사와 도절제사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는 하였으나 이를 순회 확인하는 일은 철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에 하위지는 9월 25일 요즈음 일이 번잡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는데 굳이 대신을 보내어 백성들을 시끄럽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상소를
다시 올린다.

그러나 문종은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10월 6일 정분을 우찬성겸판호조사로
벼슬을 올린 다음 삼도도체찰사의 자격으로 하삼도의 성 쌓는 일을 총찰하게
한다.

그러자 10월 8일 사간원 좌정언 구인문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뒤이어 사헌부에서는 집의 어효첨(1405~75)과 장령 신숙주 하위지, 지평
이영구가 예궐하여 면대를 청하면서까지 옳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에 문종도 할 수 없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물러선다.

이 자리에서 하위지 등은 문종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곡히 아뢴다.

근간에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의정부와 이조 병조의 대신들에게 중외의
관리들중 올려 쓸만한 자와 내쳐야 할 자를 의논하여 아뢰라는 교지를
내렸다고 하는데, 올릴 만한 자를 추천하는 것은 좋지만 내칠 만한 자를
의논하는 것은 은원이 작용하여 실상을 전도시킬 우려가 있으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문종은 금방 수긍하고 교지를 즉시 고쳐서 올릴 자만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양신이 현군을 보좌하는 정치의 이상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10월 14일 사헌부 장령 하위지는 부윤 고득종이 탐오한 인물이니 정조사로
보낼 수 없다고 상소한다.

두번이나 북경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때마다 재물을 탐하는 더러운
사람으로 지목되었고 이번에도 부상의 아들인 김술산을 종으로 꾸며서
데리고 간다 하니 그 심술을 알만 하다는 것이다.

하위지는 이것이 세번째의 간청이라 하고 있다.

이에 문종은 하위지의 3간을 받아들여 고득종 대신 조석강을 정조사로
바꾸었다.

고득종은 제주도 사람으로 조금 시율에 뛰어났으나 성품이 본래 이익을
탐하고 부풀려 자랑하기를 좋아하며 재산 모으기를 일삼아 명예와 절조를
돌보지 않았었다고 한다.

10월 27일 사헌부에서는 대사헌 안완경(?~1453)이하 집의 어효첨, 장령
신숙주 하위지, 지평 이영구 윤면 등 전부원이 연명 상서하고 사직한다.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비가 내리는 천재가 잇따르고 민력이 피폐하였는데도
토목사업이 그치지 않으며 구언을 하면서도 간언을 따르는 실상은 없고,
대신은 군주의 뜻에 영합하는 고식적인 계책을 쓰며 좌우에 세력이 커져서
임금을 가리는 조짐이 있는 등 나라의 기강이 극도로 해이해졌는데도
사헌부가 이를 바로잡을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러워 그 직책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승정원에서도 "좌우의 세력"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여 인책
대죄하는 소동을 벌인다.

그래서 10월 28일 문종은 사헌부 전직원을 사정전으로 불러들이고 도승지
이계전과 좌승지 정이한을 입회시킨 다음 이들이 상소한 내용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묻고 그에 대한 해명도 소상하게 밝힌 다음 혐의치 말고 벼슬에
나가서 직사에 충실하라고 타이른다.

그러자 10월 29일에는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의정부에서 영의정 하연이
"대신이 영합하여 고식적인 계책을 쓴다"고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를 신호로 삼기라도 한듯 좌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갑손이 잇따라 사직소를 올리고 병조판서 민신과 참판 조수량도
뒤따라 사직소를 올린다.

"군주의 뜻에 영합한다"는 말이 자신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에 당황한 문종은 승정원 승지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하위지는 과거에 등제할 때 시책에서도 대신을 기롱하고 풍자하였었는데
지금 헌부에 있으면서도 역시 그렇다. 정부 대신이 모두 사직하니 내가
헌부를 꾸짓으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의논해서 아뢰어라"

승지 정이한 정창손 김문기 이숭지 등은 이렇게 아뢰었다.

"대간은 임금과 시비를 다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그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것이라도 혹 있을 수 있는데 대신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말한 바가 모두 이치에 합당한 데서 이겠습니까.

지금 만약 지적하여 그르다고 한다면 후인으로 누가 군상의 득실을 말할
자 있겠습니까"

이에 문종은 하위지의 직언을 꾸짖지 못하고 만다.

11월 4일 하위지는 진관사 간사승이 공물을 대납하는 일로 각도의 주 군을
횡행하며 여러가지로 폐단을 일으키고 보은 복천사를 짓기 위해 충청도 도
전체가 피해를 입고 있으니 이를 금지하라고 임금께 요청한다.

그리고 도승지 이계전이 불사를 맡아 한 공로로 어의를 하사받고 좌승지
정이한이 불사를 맡아서 감독한 노고로 과전을 하사받았다 하는데 이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임금을 공박한다.

대답이 궁해진 문종은 정이한에게 과전을 내려준 것은 특별히 내려주는
예에 따른 것일 뿐이라며 억측으로 하는 말은 항상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얼버무린다.

그리고 "군자의 마음은 군자의 마음으로 헤아려야 하고 소인의 마음은
소인의 마음으로 헤아려야 한다"는 모호한 말로 하위지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문종 원년(1451)은 하위지가 35세 되는 해이다.

하위지는 여전히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1월 4일에는 진관사 간사승으로
하여금 경상도 각 고을의 공포를 실어 나르게 하고 그 값을 거두게 하니 그
폐단이 크다는 사실을 임금께 아뢰고 이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4월 20일에는 경연에 검토관으로 나아가서 "대학연의"를 강하다가
당태종과 위징(위집)의 관계에 대해 묻는 문종과 여러 각도로 문답 토론한다.

4월 24일에 문종은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수령의 배사에는 이를 모두 인견
하나 그 체임하여 돌아오는 자에게는 인견하는 법이 없었는데 그들도 모두
인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집현전으로 하여금 옛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직전 하위지가
이렇게 대답한다.

"옛 제도에는 없으나 외방으로부터 체임하여 돌아오는 자에게 알현을 허락
하여 지방의 실정을 물어봄은 실로 영전(아름다운 법전)이 될 터인데 하필
고사 유무를 살피려 하십니까?"

이로 보면 하위지는 경연의 검토관으로 나가던 문종 원년 4월 20일 이전에
집현전으로 복귀하여 직전(종3품)의 직책을 맡고 있었던듯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