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라던 장미빛 기대는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이제 끝이 보이지 않는 인고의 시절이 시작되고 있다.

태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 거의
모든 동남아 국가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한국으로 번지더니 급기야 일본도
휘청거리기에 이르렀다.

금융위기는 곧 중국에까지 전염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돌고 있고 홍콩이
다시 환투기꾼들의 공격대상이 될 가능성도 점쳐지는 형국이다.

"수십년간의 노력과 희생이 하룻밤 사이에 날아가버렸다"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의 탄식은 이제 아시아 모든 국가들의 허탈감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에 들어가 있는 태국은 지난
8일 그동안 영업정지상태에 있던 58개 금융회사중 56개사를 파산처리키로
결정했다.

이미 지난 11월에는 인도네시아도 16개 부실은행을 폐쇄한바 있다.

이같은 결정으로 한국 금융기관과 대기업들도 수십억달러를 날릴 위기에
처했지만 통화위기를 촉발한 금융회사들을 과감히 정리해 외국투자가들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당사국 정부의 의지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금융개혁 방안을 내놓는다 해도 동남아 경제가
현재의 수렁에서 곧 빠져나올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재 동남아 경제를 괴롭히는 가장큰 문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동성의
위기이다.

인도네시아 기업들은 30%의 고금리에도 돈을 빌리지 못해 사상 최악의
자금난에 허덕이고 태국의 금리 역시 사상 최고인 18%선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이 아시아경제의 운명을 좌우할 또다른 시한폭탄이
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인민은행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중국 금융기관의 부실여신은 최소
2천억달러로 총여신의 22%에 이른다.

중국계 은행들의 부실이 너무 심각해서 재무제표를 작성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는 말까지 들린다.

서방언론들의 보도처럼 중국 위앤(원)화가 10%만 절하된다 해도 아시아
각국의 통화는 또 한차례 폭락이 불가피하게 된다.

아시아의 위기상황에서 백기사 역할을 해야 할 일본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금융불안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엔화의 대달러 환율이 5년반만의 최고수준인 달러당 1백30엔대까지
치솟았고 일본 여당은 해외에서 달러자금 차입에 곤란을 겪는 자국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보유한 미국 국채를 매각하는 "최후의 수단"을
검토중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제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당사국만의, 또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전세계적인 문제이며 따라서 당사국의 노력 못지않게 광범위한 국제공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IMF의 자금지원에 한계가 있는 이상 무역 흑자국들이 갖고 있는
외화는 위기해결을 위한 거의 마지막 수단이라고 할수 있다.

통화강국들은 하루빨리 효율적인 국제협조체제를 구축, 아시아의 금융공황
사태가 세계적 대재앙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