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로잔에서 출발해 자동차로 30분쯤 달리다보면 베베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 아담한 도시에 바로 세계 최대 식품회사인 네슬레가 서 있다.

네슬레의 본사는 1백30여년전 창업 당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커졌지만
여전히 레만호를 배경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레만호의 네슬레 본사에서 지난달 18일 거창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본사 10층 대회의실로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찾아왔다.

네슬레의 경영실적을 세계에 공개하는 정례적인 추계기자회견이었지만
예년과 달리 세계 식품 업계가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특별한 "뉴스 거리"가
있었다.

올 6월에 사장겸 최고경영자(CEO)가 된 피터 브라벡사장이 "뉴스 메이커"로
세계 언론들과 대면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네슬레의 지휘봉을 잡은지 반년밖에 안되는 브라벡사장은 취임 초기부터
순항에 성공한 최고경영자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래서 지난달의 기자회견을 두고 스위스 경제계에서는 브라벡사장이 최고
경영자로 안착했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자기 스타일의 경영을 밀어붙일
것을 대외에 밝힌 자리로 해석하고 있다.

네슬레의 최근 영업실적 발표에 따르면 올 10월까지의 매출액은 5백69억
스위스프랑(스위스프랑당 약 1천1백원)으로 작년 동기대비 17.5%가 늘어났다.

매출액의 지역별 구성을 보면 특히 동남아시아 중동 중남미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매출신장률을 나타냈다는 것이 네슬레측의 설명이다.

브라벡사장은 엄격한 관리경영과 탁월한 대외 수완으로 유명한 헬무트
마우어회장으로부터 지난6월 CEO직을 넘겨 받았다.

이에따라 전임 마우어회장과 비교해 "전력"이 약하다는 일부의 우려를
감수해야 했지만 최고경영자 취임 6개월간의 "성적표"는 우수점을 받았다.

브라벡사장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지난 68년 네슬레에 첫 발을 들여
놓았다.

브라벡사장은 또 지난 20여년을 칠레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스페인 등 주로
해외에서 일을 해온 국제통이기도 하다.

따라서 브라벡사장은 해외투자에 남다른 철학을 갖고 있다.

최고경영자가 되기 전에 이미 네슬레 본사의 수석부사장으로 해외시장
동향 파악에 남다른 안목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현지시장의 환경변화에 따라 단기차익을 노려 들락날락하지 않으며 장기적
으로 승부를 보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네슬레는 지난 70년대 인도정국이 혼란을 거듭할 때에도 현지 시장에서
요지부동으로 더 강하게 뿌리를 내렸던 기업이다.

브라벡사장은 이런 전력을 자주 들먹이며 최근 금융위기에 휘말린 동아시아
와 관련해서도 이 지역에서의 투자를 계속하겠다는 전략을 강조하고 있다.

금년들어서도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국에만 아이스크림 생수 등 12개 공장을
세웠다.

브라벡사장은 지난번 기자회견장에서도 동아시아 위기와 관련한 질문에서
"만약 어떤 기업이 단기이익을 목적으로 특정국가에서 핫머니 성격의 투자
에만 신경을 쓴다면 현지 소비자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사실 네슬레는 현지 소비자들의 입맛을 고려해야 하는 식품회사로서의
사업 특성상 다국적 기업중 대표적으로 현지화가 잘된 기업으로 손꼽히고
있다.

여기에 브라벡사장의 지휘아래 현지화 전략이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브라벡사장은 또 최고 점수를 받을 자신이 없는 사업부문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다.

네슬레가 최근 와인 분야로의 진출계획을 백지화한 것도 이런 경영관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회사기획담당자의 귀띔이다.

브라벡사장은 연구개발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마다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경쟁사보다 최소한 하나라도 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을 한다.

실제 네슬레는 특정사업부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연간 5억~10억
스위스프랑을 연구개발(R&D)에 쏟아 부을 방침이다.

연구개발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는 무모한 투자는 네슬레의 사전에
없다는 뜻이다.

브라벡사장은 주변의 시기를 살 정도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온 인물이다.

영업 최전선에서 경영의 기초를 다져 마케팅의 귀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속 승진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자연히 아래 직원들을 대할 때면 "소비자 만족"을 먼저 얘기한다.

"소비자를 어렵게 여기는 자세야말로 기업 경영의 기초"라며 "성공적인
마케팅은 무엇보다 소비자들과 신뢰감을 쌓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저 완제품만을 판매할 것이 아니라 제품이 어떤 기술혁신을 거쳐 탄생
됐는지 그 제조 과정까지도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소비자들의 안목이 날로 날카로워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업의 이런 투명성은
더 절실하다는 것이다.

아시아경제 위기 등으로 현재 세계 시장의 경영 환경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다.

해외시장경험과 탁월한 마케팅능력을 자산으로 최고경영자로서 일단 후한
점수를 받고 있는 브라벡사장이 이런 우울한 분위기를 타개하고 계속 "안타"
를 칠 수 있을지 여부에 세계 최대 식품회사의 사운이 달려있는 셈이다.

< 베베(스위스) = 김수찬 기자 >

[[ 약력 ]]

<>44년 오스트리아 출생
<>66년 빈 월드트레이드유니버시티 졸업
<>68년 네슬레오스트리아 영업사원으로 입사
<>81~82년 네슬레 에콰도르 사장
<>83~87년 네슬레 베네수엘라 사장
<>92년 네슬레본사 수석부사장
<>97년 네슬레본사 최고경영자(CEO)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