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항공대 교수 / 통신학회 회장>

우리 사회는 최근 두가지 열기로 온 나라가 달구어져 있다.

대통령 선거와 IMF 금융체제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20세기를 불과 2년여 앞둔 이 시점에서 미래의 소리는 간곳 없고 과거의
소리들만이 요란하다.

이러한 혼돈속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IMF의 굴레속에 갇히게 되었으며
자칫하면 5천달러 소득시대로 되돌아가 대량 실업사태와 저성장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에 IMF 굴레를 씌우고 난 후"일본식 경영"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며 아시아는 미국식으로 구조를 전환해야 한다고 큰소리 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국의 저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정보화에서 월등한 우위성을 확보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80년대 후반 미국의 제조업이 몰락하여 일본에 점령당하고 심지어 뉴욕의
록펠러센터까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진주만 기습을 연상했지만 그것은
기습으로만 끝났을 뿐 최후의 승리는 아니었다.

미국은 중후장대의 자본화 중심의 산업화시대에서 경박단소의 정보화
중심으로 급속히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식 경박단소를 축소지향적 귀재로 칭송하면서 그 모델을
따라 갔다.

그러나 일본은 축소지향이 결코 아니며 경박단소는 더구나 아니다.

그들은 중후장대가 최종 목표일 뿐 경박단소는 한 방편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이를 가능케한 구조가 일본식 집체주의인 것이다.

최근 일본의 행정 개편이 진행되고 있다.

일본식 집체주의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과감히 탈피한다고 하지만 또다른
발상착오의 하나로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과 한국은 반도체와 컴퓨터 사업에서 비메모리 분야에 치중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경박단소의 산업같지만 비메모리 분야는 대량생산이
주요공정이므로 사실은 중후장대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대량화에 의한 외형규모가 크지만 이윤이 적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도체와 컴퓨터를 주력 산업으로 하면서도 모니터 생산이나
메모리 반도체를 주력으로 삼지는 않는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반도체 설계 기술을 독점하면서 정보화시대를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단순히 경박단소를 선택한 산업정책 뿐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한 "영어화된
세계시장"이 있고 창의적 아이디어를 스스로 생산할 능력과 교육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책 시장 생산과 교육구조가 정보시대를 또다시 리드하는 미국의
저력이다.

우리의 경우 수많은 유학생이 가고 미국과의 외교를 생명선처럼 여기면서도
이와같은 역사의 도도함을 보지 못하고 자동차 선박 메모리반도체 금융의
비대화만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모방시장의 극대화를 통해 생존해보자는 전략은 지난 시절이나
가능했던 것이고 일찍이 산업화에 성공했던 일본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정보화시대에는 이러한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시아의 금융
대란에서 증명됐다.

이제 한국은 새로운 국가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식 경박단소를 채택하여 영어속의 "한글권 세계화"를 지향해야 한다.

2% 미만의 한민족으로 5%의 세계화 몫을 차지할수 있는 경박단소의 정보화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한 여론조사의 발표로는 외제 상표 선호도가 한국 78%, 미국 52%, 일본이
18%라고 한다.

이 지표만을 가지고 국수주의나 폐쇄성을 나타낸다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적어도 일본식 집체주의를 모방할 필요는 없으며 모방과 창의를 50%씩
균형있게 조화시키는 미국식 수준을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 우리가 아니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이스라엘식 경박단소가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한글로 된 세계적 소프트웨어, 사상한의학 서비스, 김치와 태권도 상품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세계화하려면 먼저 모방 중심의 소비생활과 모방위주의
현행 교육 시스템을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창의적 생산 교육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우리가 개발 제품을 외국인에게
가르칠 교육 시스템을 도입해 우리가 개발하고 발전시킨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서도 표준으로 채택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지 않고 2등주의를 채택하는 한 우리에겐 오늘도 미래도 없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