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김대중대통령당선자의 승리는 야권후보단일화(DJT연합)와 여권
분열, 최악의 경제상황 등 여러요인이 복합작용한 결과라는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여권의 분열은 지난 87년 대선 야권의 분열과 똑같은 여권성향표의 분산을
초래, 사실상 김당선자의 승리를 위한 대선구도를 만들어 줬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여권표분열상은 수도권 다음으로 큰 표밭인 영남에서 이회창후보의
흡인력이 선거막판에 빠른속도로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인제후보가
고정표성격의 독자적인 지지기반을 구축, 이회창후보의 득표력에 제동을
건데서 잘 드러났다.

여권의 분열원인은 이인제후보의 탈당사태를 낳은 이회창후보의 지지도
급락과 이의 직접적 계기가 됐던 두아들의 "병역의혹".

김당선자측은 병역의혹이 신한국당 경선과정에서 제기된 만큼 큰 약효를
기대하지 않았으나 노동법파동과 한보사태이후 김대통령의 "힘" 약화,
경선주자들의 독자계보구축, 대표직사퇴를 둘러싼 이회창후보와 반이진영간
의 극한대결로 예상외의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최악의 경제상황은 이회창후보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20~30대 경기체감층을
중심으로 정권교체열망을 확산시켜 김당선자에게 결정적 승기를 잡게 한
것으로 분석된다.

김당선자측은 이후보가 악영향을 우려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신청을
지연시키려 했으나 외환위기가 손쓸수 없을 정도로 고조돼 유리한 선거환경
조성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이후보측은 여권내분이 11월초까지 지속됨에 따라 불가피했던 선거
준비부족, 김대통령과의 관계정립 지연, 야권후보단일화 위력 과소평가 등
적지 않은 전략적.전술적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이다.

이에비해 김당선자진영은 여론조사결과 정권교체열망이 그 어느때보다
높다는 점을 간파, "바꾸자"는 말을 자제하면서 "준비된 지도자론"을 통해
"수권능력"을 긍정적으로 부각시켰다.

김당선자측은 또한 유권자들에게 안정감을 줘 표흡인력을 높이기 위해 DJT
연합에 의한 "공동집권론"을 채택했다.

이 두가지 전략구호를 양날개로 한 김당선자는 흔들리지 않는 "안정지지세"
를 확보, 상대적으로 네가티브캠페인에 주력했던 이후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굳건한 표밭을 가꿨다.

초반부터 선거직전까지 계속된 여론조사에서의 우위는 재계 관계 언론계의
편향을 저지하는 효과를 발휘,여권프리미엄을 상당수준 무력화시켰다는 분석
이다.

막판 폭로전이 가열되는가운데서도 김당선자진영이 이후보진영의 북풍 등
각종 공세앞에 밀리지 않고 <>한나라당의 사채시장 어음할인 <>정재문 의원과
북한간 "커넥션" 의혹 <>이재왕씨의 병역의혹폭로 등으로 맞받아칠 수 있었던
것도 각계의 정보지원에 따른 것이다.

김당선자진영에도 몇차례 고비는 있었다.

한 당직자는 어려운 고비들로 <>청와대신당지원설에 따른 이인제후보 지지
도의 급락 <>DJT역풍 <>IMF재협상공방 <>건강시비 <>영남단결론 등을 들었다.

특히 막판 "재협상" 공방의 경우 내용을 잘 아는 화이트칼라층 등에
대해서는 별 영향이 없었으나 블루칼라 40대이상 여성층 농어민층에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줘 이후보에게 추격기회를 줬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오익제씨월북공방"등 색깔론은 영향이 미미했고 "김대중비자금설"
은 "너무나 엉터리여서 역공이 쉬웠다"고 관계자들은 밝혔다.

대선을 승리로 이끈 김당선자측 참모진은 새로운 레이스에 대비하고 있다.

1년반내에 IMF관리 등 위기해결을 위해 고통, 고난, 고독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김대중대통령"이 "준비된 정책"으로 경제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헌정
사상 최초로 박수받고 퇴장하는 최고의 대통령을 만드는 경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허귀식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