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제15대 대통령당선자는 김영삼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정치사의
큰 축을 이룬, 국민들 사이에 호오가 너무나 뚜렷한 인물로 통산 4번째
도전에서 대권을 거머쥐게 됐다.

김 당선자는 호남과 비호남이라는 "지역갈등구도"의 최대 피해자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수혜자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71년, 87년 그리고 92년 세번의 대권도전에서 호남출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나 그 같은 실패에도 불구, 정치적으로 재기해 이번에 대권을 거머
쥐게 된 것은 호남이라는 확실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던데 힘입은 바 크기
때문이다.

김 당선자는 40년 가까운 정치생활 동안 10개 야당을 거치면서 국회의원에
6차례 당선되고 3차례 낙선했으며, 세번의 대권도전에서 모두 실패하는 등
자신의 표현대로 "인동초"의 세월을 보냈다.

김 당선자는 그러나 마지막 도전인 이번 15대 대선을 앞두고 자민련
김종필총재와의 연대를 끈질기게 추진, 지난 10월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자신으로의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또 뒤이어 구여권의 상징적 인물중 한사람인 박태준의원을 연대에 끌어
들이는데도 성공, 대권획득의 발판을 구축했고 지난 3개월여 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도 1위를 꾸준히 유지했다.

호적상 1925년생(만 72세)인 김당선자는 54년 정계에 투신, 국회의사당의
문을 두드렸으나 3차례 거푸 좌절을 맛본 뒤 61년 제5대 강원도 인제의
5.13 보궐선거에서 생애 첫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당선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발생, 의원선서도 하지 못한채 의원직
을 상실했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본산이 된 전남 목포에서 6대와 7대 총선에서 연달아
당선한데 이어 8대 총선에서는 전국구로 의회에 진출, 중견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김 당선자가 김대통령과 함께 한시대를 풍미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한 것이나
또 오늘의 대통령당선자에 이르게 된 발판은 지난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전이었다.

김 당선자는 당시 김영삼씨와 함께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결선투표까지
가는 불꽃튀는 경쟁을 벌여 뒤집기에 성공했었다.

김 당선자는 여세를 몰아 71년 박정희후보에 도전했지만 95만표 차이로
석패, 거듭되는 "대권도전사"의 첫 장을 열었다.

김 당선자는 이후 일본 도쿄에서의 피납사건 등 유신이래 5년반 동안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반의 가택연금, 신군부에 의한 사형선고 등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어두운 정치의 뒤안길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김당선자는 미국에 망명해 있던 84년 국내의 김영삼씨와
함께 민추협을 결성했으며, 이듬해 국내로 돌아와 2.12 총선에서 "신당돌풍"
을 이끌면서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씨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급조, 재야의 비판적 지지를 업고 대선에 출마했다가 노태우, 김영삼후보에
밀려 3등을 기록함으로써 대권 실패 이력을 보태고 말았다.

김 당선자는 91년9월 "꼬마민주당"의 이기택씨와 야권통합을 성사시킨데
이어 3.24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실현한 뒤 92년 3번째 대권고지 등정에
나섰지만 김영삼후보에게 패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야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종지부가 찍힌 듯 했던 그의 대권도전사는 93년7월 영국에서의 "은둔생활"
을 청산하고 귀국한 뒤 95년 9월 국민회의 창당을 계기로 새롭게 쓰여지기
시작했다.

김 당선자는 초유의 정치적 실험인 정당간 연립정권을 전체조건으로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룩해 냄으로써 국민들에게 "안정속의 변화"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 박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