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그렇게 사랑을 표시하면 김치수는 약간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그런 솔직함이 싫지는 않았다.

싫기는 커녕 젊은 처녀와 데이트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을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음악시스템을 갖추고 싶다는 미화를 데리고 악기점에
들렀다.

이 세상 모든 음악시스템은 다 갖추었다 싶은 전파사에서 그들은 우연히
시디판을 사러나왔던 영신의 모친, 그러니까 자기 마누라와 딱 마주쳤다.

그러나 기지가 번뜩이는 김치수는 얼른 미화를 마누라에게 소개한다.

"비서실에 새로 들어온 황미화양이야. 인사 드려. 이쪽 미인은 나의
어부인시다. 사모님께 인사드려라"

그렇게 해서 어색한 자리는 무마되었지만 그녀의 성이 황씨라는 것이
아무래도 얼마전 영감님이 고아드신 황구렁이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영신의 어머니는 가슴에 콱 찔려오는 것이 있었다.

아내들의 육감이란 대단한 것이다.

그날밤 영신은 머루포도를 깨끗이 찬물에 헹구어 놓으면서 어머니에게
쇼킹한 질문을 받는다.

"얘 영신아, 그 비서실에 새로 들어왔다는 그 미스 뭔가 하는 여비서,
아버지와 뭔가 좀 냄새가 나는 관계인 것 같더라"

영신이 같이 능수능란한 사교계의 여왕도 그 순간은 어머니에게
죄스러운 마음으로 업드려 사죄하고 싶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영신은 그렇게 담이 약한 여자다.

"깡촌 출신의 조그맣고 볼품없는 아이지요?"

"아냐. 너희 아버지 연배가 되면 그런 여자아이를 좋아할 수 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어머니의 서글픈 듯한 얼굴에 영신은 살짝 뽀뽀를 날린다.

"아버지는 실수없이 평생동안 사시지 않았어요? 좀 더 근사한 미인들이
쌔고 쌨는데 하필이면 그런 촌아이를 선택하시겠어요?"

"아냐. 네 아버지가 요새 너무 모양을 내. 생전 안 하던 구렁이까지
고아잡수시고.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다"

"아유 엄마도. 그렇담 제가 알아볼게요. 아버지는 저에게 무엇이든
숨김이 없으시니까요"

"하지만 알면 뭘 어쩔 거냐? 그이도 이제 다 산 인생이니 자기자신을
위한 생활이 있어야겠지. 안 그러냐? 영신아"

"엄마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모르는게 약이 될 경우도 있구. 엄마야말로
요새 무슨 낙으로 지내세요?"

"나? 글쎄다. 무엇으로 산다고 해야 할까?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행복이나 기쁨은 조금도 안 보인다.

그냥 죽지 않으니까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무덤덤하고 흐리멍텅하고
재미없는 모습을 연출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