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 끝나고 돈을 주마"

"또 실업자연금에서 주실려구요"

아들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는 화기애애하던 식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아버지는 식사를 채 끝내지 못하고 자리를 뜬다.

실직한 두 가장의 힘겨운 희망찾기 과정을 그린 미개봉작 "밴(Van)"이
비디오로 나왔다.

감독은 스티븐 프리어즈.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등을 통해 영국현실을 통렬하게 꼬집으며 80년대
영국영화의 기수로 꼽히다 할리우드로 건너가서는 이렇다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글렌 클로스, 존 말코비치 주연의 "위험한 관계", 존 쿠작, 아네트 베닝의
"그리프터스"엔 그만의 독특한 유머와 분위기가 살아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더스틴 호프만, 지나 데이비스의 "리틀 빅 히어로", 존 말코비치,
줄리아 로버츠의 "메리 라일리" 등 이렇다할 특징이 없는 작품을 내놓아
팬들을 실망시켰다.

프리어즈가 올해 영국으로 돌아가 만든 "밴"은 그의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재능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담아내는 89~90년 아일랜드의 현실은 IMF체제 아래 놓인 97년
한국사회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89년 11월,더블린 북부의 배리타운.제과회사에서 일하던 빔보(콜름미니)는
갑작스레 해고통지를 받는다.

위로한답시고 술집에 모인 친구들도 대부분 마찬가지 처지.

특히 먼저 퇴직한 친구 래리(도날 오켈리)의 처량한 신세는 그를 더욱
답답하게 한다.

치매에 걸린 장모, 사랑스런 아내, 똘망똘망하고 개구진 세 아이.

빔보는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어 보지만 25년후에나 자리가 난다는
통지서나 받는다.

한 친구로부터 건네받은 폐차 직전의 밴 한대에 희망을 거는 빔보네 가족.

빔보는 퇴직금을 몽땅 털어서 그럴듯한 스넥차로 꾸미고 래리를 동업자로
끌어들인다.

불황에 허덕이는 아일랜드인들은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축구 최종 예선에
빠져 세상의 온갖 근심을 날려버린다.

빔보의 스넥차는 사람들이 모여 축구경기를 보는 장소를 옮겨다니며
월드컵특수를 누린다.

일이 바빠질수록 두 가장은 신이 나고 냉랭하던 가족사이에도 활기가
넘쳐난다.

잘 나가던 이동식 스넥사업은 빔보와 래리사이에 불화가 생기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다.

꼼꼼한 빔보는 덜렁대고 제멋대로인 래리가 못마땅하고 래리는 마치
종업원처럼 취급당하는 게 불만.

점점 고조되는 둘의 갈등.

술취한 빔보는 우정을 파괴하는 밴을 부숴 버리겠다고 몰고 가자 래리는
허겁지겁 빔보를 뒤쫓는다.

영화는 소시민의 일상적인 삶을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세밀하게 파고
들어간다.

감상주의에 빠지거나 이리저리 뒤틀어서 냉소적으로 흐르지 않은채
복잡다단한 인생사를 드러낸다.

전편에 흐르는 에릭 클립튼의 기타 선율도 감정조절을 잘 뒷받침한다.

우울한 환경에 쉽게 절망하거나 그렇다고 쉽게 희망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극은 끝까지 흘러간다.

빔보와 래리는 그들의 희망이던 밴을 바닷가에 버려둔 채 시련을 통해
더욱 굳건해진 우정을 발견한다.

< 송태형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