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도어를 잠그고 미화에게
전화를 건다.

아무리 신호가 가도 전화를 안 받는다.

그는 핸드폰을 걸어보기로 한다.

이 아이가 혹시 밤에 외출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밤 12시가 가까운데 어디로 외출할 곳이 있다는 말인가.

미화가 혹시 바람이라도 난게 아닐까?

김치수는 의혹의 거센 폭풍에 휘말리면서 안절부절 못 한다.

지금같은 사랑의 천국에 이변이 생긴다면 어떻게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는 핸드폰과 수동전화기를 1분간격으로 눌러대면서 가슴을
졸인다.

망할 년, 제 년이 나를 속여?

만난지 석달도 안 되었는데 벌써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빵가게를 공연히 미화앞으로 해준게 아닐까.

이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안 해주리라.

그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들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맑은 음성이 들리기
만을 고대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옥을 굴리는 듯 청아하다.

사람이 좋아지면 목소리가 먼저 좋아지는 걸까.

수억의 플러스를 냈다는 경리담당 이사의 보고보다도 그녀의 목소리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천금을 주고도 못 살 그런 음성이다.

미화의 존재가 언제부터 이렇게 소중하게 된 걸까.

그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자기 와이프가 기거하는 안방으로 간다.

"안방에를 다 오시고 웬 일이우"

아내는 약간 토라졌지만 평소대로 그녀의 너그러움을 조금도 잃지 않고
미소하며 맞는다.

새삼스레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는 아내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지그시 눌러잡으며, "여보 미안해.
내가 요새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 때문에 당신에게 소홀했던 것 같아.
미안해요"

그는 아내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여보,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

"이해하고 자실 것도 없지요. 원래 본마누라 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요?
가끔가다 어떻게 생각나면 들러서 무릎베개나 하다가 가는 정자 같은 거
말유. 어쨌든 당신이 병없이 오래 살고 즐거우면 됐어요"

그러나 그녀도 요즘 참으로 이상한 경험을 한다.

50이 넘은 운전기사 최씨가 그녀더러 사모한다는 고백을 해왔던 것이다.

하기는 15년간 같이 동거동락하니 한식구 같은 사람이긴 하다.

언젠가 온천에 최씨와 동행했을 때 하룻밤을 같이 지낸 일이 있다.

최씨는 응큼하게도 젤리까지 사가지고 와서 동침할때 그것을 사용하게
했다.

생전 처음 외간남자를 안아보는 그녀는 어리둥절한 속에서 정말 희한하게
청춘이 회생하는 충족감을 맛보았다.

어떤 것 하고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