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위기는 정부에서 그동안 주장해온 외환위기 금융위기가
아니다.

만일 동남아 외환시장에서 시작되어 북상하고 있는 외환위기가 문제라면
대만이 안 걸려들 이유가 없고,한국 금융산업의 생산성이 취약해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문제라면 우리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일본도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야 한다.

한국경제의 위기는 외환과 금융이라는 빙산의 돌출부분 밑에 잠겨 있는
실물 경제, 즉 기업의 위기이다.

국제경쟁력을 잃어버린 상품과 부채비율 4백50%에 달하는 취약한 재무구조
때문에 고객과 금융기관으로부터 기업으로 들어오는 수입, 즉 현금흐름에
애로가 발생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IMF로부터 긴급융자를 받았다.

그 결과 우리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수는 있었다.

그 과정에서 IMF가 변장한 천사(angel in disguise)라는 긍정적인 표현도
나오고, IMF 신탁통치가 시작되었다는 부정적인 표현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IMF가 한국경제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엄밀하고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한국경제에 대한 IMF의 개입은 5백70억달러 긴급융자라는 당근과
부대조건 이행이라는 채찍의 두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

우선 IMF긴급융자는 한국경제의 신용파탄으로 인해 발생한 현금순환의
경색을 해소하는 단기처방으로 필요한 조치였다.

그러나 긴급융자금 자체는 신용파탄의 직접 원인이 된 과다한 기업
부채를 줄이는데 전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 하면 IMF자금은 전액 융자금으로서 그중 1달러도 한국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투자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IMF긴급융자는 만기가 도래한 해외채무에 대한 한국기업들의 연장
요청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한국 기업들에 채무 변제능력이 전연 없는 경우 해외 금융기관은 이들로
하여금 사업을 계속해서 채무를 갚도록 만기가 도래한 채권을 연장
(roll-over)해 줄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IMF 긴급융자금을 쓸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해외 은행들은 다른 은행보다 먼저 대출금을 회수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게 된다.

결국 IMF 긴급융자의 순효과는 한국기업들에 대출된 일반 해외
금융기관들의 단기 융자금이 한국정부에 대한 IMF의 장기융자금으로 전환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IMF긴급융자는 IMF라는 국제기관이 한국을 지원한다는 상징성에
의미가 있을 뿐, 자금의 규모자체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IMF가 우리에게 줄수 있는 진정한 도움은 부대조건을 통해서이다.

기업의 과다한 부채보다도 한국경제에 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 재벌 노조
소비자 등 이익집단들이 집착하고 있는 소아적 자세이다.

IMF는 부대조건을 통해 바로 이들에게 한국경제 전체를 위해서 힘을 합치는
대승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에는 기업에 대한 왜곡된 지원과 부당한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하고, 기업에는 투명한 경영 합리적인 투자를 요구하며, 노조에는
정리 해고를, 소비자에게는 사치성 소비자제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IMF의 개입이 한국 경제에 최대한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정부가 다음 순서에 따라 상황을 풀어나가야 한다.

첫째 IMF 긴급융자금으로 현금 순환의 단기적인 애로를 극복한다.

둘째 외환 금융 기업 산업 노동 관련 정책을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혁신적으로 변환한다.

셋째 한국 상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업들로 하여금 전문화
기술투자 상표력강화 등에 노력을 집중토록 한다.

넷째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단계적으로 개선되도록 하는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여 해외 금융기관들의 신뢰를 얻는다.

구체적으로는 재벌 계열사간의 상호지급보증및 상호출자 관행을 해소하고,
경영과정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며, 사외이사제도 등 기업지배구조를 확립하게
한다.

IMF는 긴급융자를 통하여 한국 경제가 해외 금융기관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대장정의 시발점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한국 경제를 신뢰와 경쟁력이라는 종착점까지 끌고 나가는 역할은
한국 정부, 한국 기업, 그리고 한국 국민의 몫이다.

우리 다같이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 작업을 완수하자.

이제 21세기까지 꼭 2년이 남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