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것은 어디서나 믿음이 된다.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오는 저물녘의 귀가길.

"고개숙인 아버지"의 어깨 위로 유난히 굴곡 많고 주름진 한 시절이
부서져 내린다.

한때 황금빛 은행잎들로 가득했던 이 길.

남루한 옆구리에 얇은 희망을 끼고 우리시대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쓸쓸하게
돌아온다.

한보비리와 기아사태로 휘청거렸던 날들, 외환위기와 IMF 한파로 독감을
앓은 자리도 아물지 않았다.

KAL기 참사로 2백32명의 아까운 생명을 잃고, 그보다 훨씬 많은 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던가.

그러나 깊은 골에서 맑은 물이 시작된다는 것도 우린 안다.

상처가 깊을수록 희망도 큰 법.

그래, 세상을 덮고도 남을 저 우울한 그림자 밑으로 몸을 더욱 낮추자.

부드러운 흙과 새로 돋는 떡잎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빛나는 태양
아래 세수를 말끔히 끝낸 아이들이 눈부시게 달려오는 소리, 깊은 산에서
내려 꽂히는 청류의 폭포소리 힘차게 들리리라.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