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는 마음이 이렇게 무겁고 어둡던 때가 일찍이 있었던가.

뭔가 잘 될 것 같은 기대, 어떻게든 잘 해봐야 겠다는 다짐과 함께 맞는
순간이건만 1998년의 첫날 아침은 그렇지가 않다.

온통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 투성이이다.

기대와 희망을 걸어볼 구석이라고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엔 찾아보기
힘들다.

기약없는 IMF 관리경제가 금년에 우리 경제, 우리 국민생활 그리고 정치와
사회전반에 가져올 파장은 과연 어떻고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새로이
출범하는 DJ정권의 모양새와 국정운영모습은 어떨건지 한결같이 기대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더 앞서는게 지금의 솔직한 심경이다.

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는 분명 의의가 큰 일이다.

우리의 민주정치를 한단계 높였고, 국제사회의 평가도 격상시켰다.

그러나 불안감도 크다.

여야가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의 정치(인)풍조,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인사에다 무경험에 자리나눔, 자리다툼까지 가세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이만저만 걱정스러운게 아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불안한 눈길로, 특히 새집권자에게 표를 주길 거부한
60%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새정부의 출범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소망 한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묵은 정권이
지난 5년간 저지른 과오, 참담한 전철만은 제발 밟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리라.

정치는 그렇다 치고 진짜 걱정은 경제다.

국가부도위기는 요행히 모면했지만 외환위기가 가신건 결코 아니다.

언제 또 벼랑끝에 내몰릴지 모른다.

갚아야할 외국 빚과 외환보유고를 서민 가계부적듯 매달 챙겨야 하는
불안한 살림이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계속될지 알수없다.

많은 기업들이 쓰러지면서 금융계와 기업,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지각변동에 견줄 변화가 구조조정 혹은 개혁이란 이름으로 닥칠 판이다.

타율적이긴 하지만 구조조정은 이제 피할수 없는 명제가 되었다.

시장은 어느 분야 할것 없이 1백% 개방될 운명에 놓였고, 외국자본에 의한
금융기관, 매력있는 제조-서비스업체의 M&A바람도 역시 거셀 전망이다.

M&A를 안 당하더라도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환골탈태의 변신을 해야 하게
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 기업이 이 과정에서 정비 정리되고, 얼마나 많은 실업자가
배출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원컨 원치 않건 정리해고는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뒷걸음질칠 공산이 크다.

물가는 또 얼마나 뛸까.

기름값을 필두로 새해 벽두부터 줄줄이 오를 것들이 이미 예고돼 있는
현실이다.

그래도 인플레는 실직과 실업사태가 가져올 고통과 불안보다는
낫다.

인플레가 단지 일부를 빼앗기는 것이라면 실업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그것도 가급적이면 빨리.화두는 이제 온통 경제살리기와 IMF 관리탈출에
쏠린다.

정치도 그렇고 새 정권의 첫번째와 지상의 과제도 경제일 수밖에 없다.

1998년은 정부수립후 꼭 50년이 되는 해이다.

정부수립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민의에 의한 평화적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새 정권의 출범을 보게 된 것은 우선 정치사적으로 의미가 크지만
경제적으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진정 과감한 개혁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설계를 할 절호의 순간을 맞았다고 할수있다.

새 정권은 그야말로 할 일이 많다.

국민들은 불안해 하면서도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새 지도자와 집권당은 이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든 경제를 살려놓아야 하고 다시는 오늘같은 참담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튼튼한 경제, 제대로된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

우선 잘 잘못을 분명히 가릴 필요가 있다.

오늘과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다.

단지 책임자를 단죄하기 위해서거나,마녀사냥식의 분풀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오늘의 문제는 50년 적폐의 소산이라고 봐야 한다.

또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고 책임이다.

우리는 지금 화풀이 청문회로 에너지를 낭비할만큼 한가한 상황이 못된다.

미래지향적으로 힘을 결집하고 하루 빨리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할 때다.

과거의 업적과 경험은 값진 것이다.

무작정 버려야만 할 것은 아니다.

먼저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는지 명확하게 가려 반성하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나아갈 방향을 그려야 한다.

변화와 개혁없이는 미래가 없다.

불과 3년 앞으로 다가온 21세기를 준비할 마지막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백지위에 그림을 그리는 심정으로
개혁하고 변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가 달라지고,정부 기업 가계 등 모든 경제주체가
새 틀속에서 새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두가 변화와 개혁을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예외로 생각한다.

잘못은 모두 남에게 돌리고 변명에 능하다.

정부 기업 근로자는 각자 할 일을 찾아 솔선해야 한다.

모든 개혁을 함에 있어서는 IMF요구 때문이라는 상투적 핑계가 아니고
우리자신의 선택과 결의에 따라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IMF 한파에서 오는 고통가운데 많은 것은 일과성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계속되고 체질화되어야 할 내용이다.

검약한 생활, 합리적 사고와 투명성이 모든 부문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어느 해보다 분주하고 할 일이 많을 해의 첫날 아침을 맞아 우리 모두
각오를 새롭게 하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