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외환위기 한파는 이역만리 교민사회의 새해맞이에도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모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일원이 됐다는
자부심에 차있던 교민사회는 조국의 외환위기 소식에 급격히 위축된채
새해를 맞고 있다.

유학생 상사주재원 교포기업인 등 교민사회 구성원들은 막연히 들떴던
여느 새해와 달리 올해는 내핍의 고통을 각오하며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는
모습들이다.

다른 한켠으로는 "모국을 돕자"는 취지에서 십시일반으로 달러모금
캠페인을 펴는 애국심도 발휘되고 있다.

새해를 맞는 우리 교민사회의 분위기를 해외특파원들을 통해 살펴본다.

< 국제1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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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

2백만 미국 교민들은 여느 때보다도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무인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유학생들의 경우 수천명이 이미 학업을 포기하고 "철수"했거나 귀국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계 지.상사는 분위기가 더 흉흉하다.

주재원들 상당수가 귀국 조치를 당했으며 잔류자들도 주재비가 대폭
삭감됐다.

현대 삼성 LG 등 대기업그룹 주재원들은 주택수당이 20~30% 삭감된 것을
비롯 차량유지비 등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원화 기준으로 지급받고 있는 봉급이 달러로는 작년 이맘때의 절반
수준으로 내려앉는 바람에 "이중생활고"를 호소하고 있다.

교민들의 절반 이상이 몰려 살고 있는 뉴욕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등 3개주
지역의 한인사회는 주재원들에 의존하는 식당-식품점-여행사 등의 타격이
특히 크다.

설렁탕으로 유명한 G식당의 경우 손님이 급감하는 바람에 오전 개업시간을
두시간 늦추는 등 비상 영업체제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국의 경제위기는 교민사회에 "조국애"와 한인 상호간 결속을
다지게 하는 촉매제로도 작용하고 있다.

뉴욕의 한인 드라이클리너협회는 2,000여명의 회원들의 열띤 호응 속에
"가구당 1,000달러씩 본국에 송금하기" 캠페인을 펴고 있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

[[ 영국 ]]

런던의 상사주재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 비해 비싼편인 현지물가가
원화가치 폭락으로 더욱 뛰어오른 셈이 돼 잔뜩 위축되고 있다.

원화로 따질 경우 현지 물가는 요즘 담배 한갑에 9천원, 자장면 한그릇이
2만원에 달해 "파운드화 쓰기가 겁날 정도"라는 것.

이에 현지 주재원들은 담배나 외식을 아예 삼가고 있는데 이바람에 한국
식당들도 매출이 70%이상 격감, 울상을 짓고 있다.

한편 한국의 상사주재원들이 이처럼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런던에서는
영어 피아노 등의 과외선생들이 한국계 학생들에게 "할인혜택"을 주는
선심을 베풀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런던의 과외선생들은 통상 시간당 15파운드 정도를 받고 있는데 최근
한국계 학생들에게는 3~5파운드로 파격적인 할인혜택을 주고 있는 것.

5년째 한국인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앤터니 프리만(35)씨는
"한국인들과 고통을 같이한다는 차원에서 과외비를 깎아주고 있다"고 말했다.

< 런던=이성구 특파원 >

[[ 독일 ]]

IMF구제금융상황속에 새해를 맞는 재독교민들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하다.

그중에도 60년대 중반 광부나 간호사로 나와 서글픈 이국생활을 견뎌내며
외화획득에 앞장섰던 이들은 부도직전의 한국경제를 바라보는 느낌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모처럼 한국에 들어가 볼 때마다 지나친 소비풍조에 놀랐었다.

이 모든게 오늘의 사태를 만든 원인"이라는 한 교민의 말에는 허탈감마저
배어 있다.

하지만 재독교민들은 모국의 경제를 다시 일으키는데 일조하자는 의욕도
그만큼 크다.

"우리는 쓰러지면 또 일어서는 오뚜기 민족"이라는 베를린한인회 김광숙
회장의 한마디가 이를 대변한다.

독일교민들이 해외교민중 가장 먼저 지난해 11월 외화본국송금 운동에
나선 것도 이런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 베를린=송태수 특파원 >

[[ 일본 ]]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요즘 외화송금운동을 펴고 있다.

지난 12월15일 민단중앙본부에서 열린 외화예금계좌 개설모임에서는 간부
27명이 1차로 3백65만엔을 예금했다.

신용상단장은 별도로 신한은행에 5백만엔의 계좌를 개설했다.

한창우 재일한국상공회의소회장도 1천만엔을 저금했다.

민단은 "세대당 1통장 10만엔이상"의 계좌개설을 목표로 하는 이 외화송금
운동을 3월10일까지 펼 계획이다.

일본의 주재원들은 최고 50%선에 이르는 경비절감목표달성을 위해 허리띠
졸라매기에 온 신경을 쏟고있다.

은행에서 근무중인 주재원 L씨는 점심을 도시락으로 바꾸었다.

11시40분께 지하매점에 들러 5백엔정도짜리 도시락을 산다.

식사후에는 회사에 비치된 인스턴트커피를 마신다.

종합상사에 근무하는 K씨는 거래선들과의 약속을 저녁 대신 점심으로
바꾸었다.

1차 저녁, 2차 술, 3차 가라오케로 해온 관행을 아예 점심에다 생맥주
한잔으로 바꾸어버렸다.

차량유지보조비가 없어짐에 따라 2년전에 구입한 중고차도 조만간 처분할
계획이다.

무역협회 도쿄지부도 경비절감을 위해 같은 빌딩안에 있는 좀 더 작은
사무실로 곧 이사를 갈 계획이다.

< 도쿄=김경식 특파원 >

[[ 프랑스 ]]

지난해 11월말 한국의 대형 여행사들이 부도를 내고 무너지는 바람에
체납대금을 받지 못해 울상인 파리의 한인 여행사들은 한국인 관광객마저
격감하자 아예 문을 닫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여행사뿐 아니라 한국식당 면세점 등도 개점휴업 상태고 파리시내 한
면세품 매장에서는 30명의 한국인 점원중 23명을 감원했다.

유학생들도 파트타임 일자리 찾기에 혈안이 되고 있으나 그나마 이들의
주요 일자리였던 관광안내 수요가 크게 줄어들어 귀국길에 오르는 유학생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재불한인회에서는 이번 기회에 한인업소들의 한국고객 의존도를 낮춰
교민사회의 자생력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파리=강혜구 특파원 >

[[ 이탈리아 ]]

한국대사관의 추계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6천여명
이며 이중 유학생이 4천여명에 달한다.

대부분이 음악분야인 이들 유학생은 한국의 외환위기 이후 개인레슨을
줄이거나 숙소를 더 허름한 곳으로 옮기는 등의 방법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원화절하 폭이 워낙 커 이 정도의 대책으로는 상쇄가 안되는 실정이다.

게다가 이들의 주요 부업수단인 관광안내도 한국인 관광객의 감소로
일감이 거의 끊긴 상태여서 하나 둘씩 보따리를 싸는 유학생이 늘고 있다.

한편 이탈리아 패션산업의 메카인 밀라노에서는 한국과 거래하던 업체들이
한국바이어들의 주문취소, 가격인하요구에 울상을 짓고 있다.

이곳 업계에 따르면 한국의 거래선들은 최근 수주물량을 전량 또는 30%
이상 취소하거나 지불기한 연장, 가격 추가인하 등을 요구하는 사례가 속출
하고 있다는 것.

< 로마.밀라노=노난란.황인경 특파원 >

[[ 중국 ]]

국내 외환위기가 장기화되면서 중국 주재 상사원이나 유학생들도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98년도를 맞고 있다.

12월 들어서면서 베이징에서 볼 수 없는 얼굴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더니
연말쯤엔 10명중 3~4명이 귀국보따리를 쌌다.

남아있는 상사주재원들의 걱정도 태산같다.

서울본사가 월평균 4천~5천달러인 주거비를 월 3천달러 선으로 줄일 것을
요구하자 외국인전용거주지역이 아닌 중국인 아파트로 옮겨가고 있다.

상사주재원들의 또다른 고민은 자녀들의 교육비조달문제이다.

그동안은 연간 7천~1만5천달러(외국인학교기준)에 달하는 교육비를 소속
회사들이 50~1백%씩 지원해왔다.

그러나 우리돈이 평가절하되면서 각 회사는 "현지 학교가 아니면 지원할
수 없다"는 지침을 내렸고 이에 상사주재원들은 서둘러 자녀를 중국학교로
전학시키고 있다.

유학생들도 석.박사과정이나 본과의 경우 1~2명이 생활하는 곳에서 3~4명이
함께 생활하는 싼 기숙사로 옮기고 있고 어학연수생들은 아예 국내로 철수
하고 있다.

윤여백 베이징유학생회장은 "단기언어연수과정에 등록한 한국유학생의 80%
가량이 신학기등록을 포기하고 귀국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베이징=김영근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