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띠해에 얽힌 이야기] '무인년' .. 하반기 들어 차츰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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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은 무인년, "범(호랑이)띠 해"다.
60간지로는 15번째이며 방향은 동북동, 오행은 토목에 해당한다.
한자로 호는 일반적인 범을, 표는 작은 범을, 표는 표범을 일컫는다.
우리말에서 범을 무섭고 사나운 뜻으로 얘기할 때 호랑이라는 표현을 쓴다.
호랑이는 5백만~2백만년전 시베리아및 동북아시아에 처음 출현한 고양이과
에 속하는 동물.
몸길이는 1.8~2.5m, 몸무게는 2백~3백kg이다.
먹이를 찾아 하루 평균 80~1백km를 달리며 걸을 때의 보폭은 80cm다.
항상 뒷발이 앞발자국을 밟는 습성이 있다.
뛸 때는 보폭이 4m지만 먹이를 뒤쫓을 때는 7~8m나 된다.
호랑이는 일출과 일몰직전을 가장 좋아하고 자기가 잡은 신선한 야생동물만
먹는다.
한반도에는 일찍이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다.
호랑이가 너무 많아 고려와 조선에서는 착호군을 편성, 운영할 정도였다.
특히 우리 강토의 호랑이는 늠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했다.
한국문화에서 호랑이는 인간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의 상징인 한편으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곰과 함께 건국신화에도 나오며 맹수산수지군 산신령 산군 등으로 불렸다.
육당 최남선은 26년에 쓴 "조선역사및 민속사상에서의 호랑이"를 통해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이집트의 사자, 로마의 이리처럼 조선에서는
첫번째 신성한 동물로 호랑이를 친다"며 "조선은 호담국이라고 할 만큼
범이야기의 특수한 인연을 가진 곳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에 관한 얘기가 6백35차례나 나오는데 "기우제에
호랑이 머리를 사용했다" "호환이 있었다"는 사실 기록과 함께 엄한 학정,
몹쓸 일, 어려운 일 등에 호랑이를 비유하고 있다.
매년 정초가 되면 궁궐과 일반 민가에서 호랑이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나쁜 귀신의 침입을 막는 풍속이 있었으며 삼재를 막는 부적에도 호랑이를
그렸다.
음력 정월의 첫번째 범날 여자들은 문밖 출입을 삼갔으며 모든 범날 남의
집에서 소변보는 일, 잠자는 일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또 호랑이를 산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냈으며 마을의 수호신인 동신으로도
추앙됐다.
도인 모습을 그리는 산신도에도 호랑이가 항상 끼어 들었다.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자주 등장한다.
매 까치 소나무 대나무 인물등과 결합돼 특수한 상징을 나타냈다.
특히 호랑이와 까치를 함께 그린 작호도는 정월 초하루 문이나 벽에 걸어
액운을 쫓는 방패막이로 여겼다.
호랑이와 장생의 상징인 소나무를 함께 그린 송호도는 노부부의 장수를
축원하는 그림으로, 대나무숲에 있는 호랑이를 그린 죽호도는 병귀를 쫓는
그림으로 애용됐다.
사주에 범이 들어있는 사람중에는 종교인 예술인이 많고, 특히 큰스님
가운데는 범띠(인년) 범달(인월) 범날(인일)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고 한다.
또 일반적으로 범띠는 성미가 급하나 다정다감하며 관대하다고 여겨진다.
1398 무인년에는 태종 이방원이 왕권 확보를 위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며, 1818 무인년에는 병자호란으로 민생이 피폐해진 것을 개선하기
위해 김육의 대동법이 실시됐다.
1998 무인년은 유학의 본산 성균관이 세워진지 6백년이 되는 해이며,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지 4백년이 되는 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세상을 뜬지도 1백년이 됐다.
1백년전인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건립됐으며,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이 창간됐다.
< 오춘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일자).
60간지로는 15번째이며 방향은 동북동, 오행은 토목에 해당한다.
한자로 호는 일반적인 범을, 표는 작은 범을, 표는 표범을 일컫는다.
우리말에서 범을 무섭고 사나운 뜻으로 얘기할 때 호랑이라는 표현을 쓴다.
호랑이는 5백만~2백만년전 시베리아및 동북아시아에 처음 출현한 고양이과
에 속하는 동물.
몸길이는 1.8~2.5m, 몸무게는 2백~3백kg이다.
먹이를 찾아 하루 평균 80~1백km를 달리며 걸을 때의 보폭은 80cm다.
항상 뒷발이 앞발자국을 밟는 습성이 있다.
뛸 때는 보폭이 4m지만 먹이를 뒤쫓을 때는 7~8m나 된다.
호랑이는 일출과 일몰직전을 가장 좋아하고 자기가 잡은 신선한 야생동물만
먹는다.
한반도에는 일찍이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다.
호랑이가 너무 많아 고려와 조선에서는 착호군을 편성, 운영할 정도였다.
특히 우리 강토의 호랑이는 늠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했다.
한국문화에서 호랑이는 인간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의 상징인 한편으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곰과 함께 건국신화에도 나오며 맹수산수지군 산신령 산군 등으로 불렸다.
육당 최남선은 26년에 쓴 "조선역사및 민속사상에서의 호랑이"를 통해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이집트의 사자, 로마의 이리처럼 조선에서는
첫번째 신성한 동물로 호랑이를 친다"며 "조선은 호담국이라고 할 만큼
범이야기의 특수한 인연을 가진 곳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에 관한 얘기가 6백35차례나 나오는데 "기우제에
호랑이 머리를 사용했다" "호환이 있었다"는 사실 기록과 함께 엄한 학정,
몹쓸 일, 어려운 일 등에 호랑이를 비유하고 있다.
매년 정초가 되면 궁궐과 일반 민가에서 호랑이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나쁜 귀신의 침입을 막는 풍속이 있었으며 삼재를 막는 부적에도 호랑이를
그렸다.
음력 정월의 첫번째 범날 여자들은 문밖 출입을 삼갔으며 모든 범날 남의
집에서 소변보는 일, 잠자는 일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또 호랑이를 산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냈으며 마을의 수호신인 동신으로도
추앙됐다.
도인 모습을 그리는 산신도에도 호랑이가 항상 끼어 들었다.
민화에서도 호랑이는 자주 등장한다.
매 까치 소나무 대나무 인물등과 결합돼 특수한 상징을 나타냈다.
특히 호랑이와 까치를 함께 그린 작호도는 정월 초하루 문이나 벽에 걸어
액운을 쫓는 방패막이로 여겼다.
호랑이와 장생의 상징인 소나무를 함께 그린 송호도는 노부부의 장수를
축원하는 그림으로, 대나무숲에 있는 호랑이를 그린 죽호도는 병귀를 쫓는
그림으로 애용됐다.
사주에 범이 들어있는 사람중에는 종교인 예술인이 많고, 특히 큰스님
가운데는 범띠(인년) 범달(인월) 범날(인일)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고 한다.
또 일반적으로 범띠는 성미가 급하나 다정다감하며 관대하다고 여겨진다.
1398 무인년에는 태종 이방원이 왕권 확보를 위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며, 1818 무인년에는 병자호란으로 민생이 피폐해진 것을 개선하기
위해 김육의 대동법이 실시됐다.
1998 무인년은 유학의 본산 성균관이 세워진지 6백년이 되는 해이며,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지 4백년이 되는 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세상을 뜬지도 1백년이 됐다.
1백년전인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건립됐으며,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이 창간됐다.
< 오춘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