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얼굴이며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인 서울 명동대성당이
올해로 건립 1백주년을 맞는다.

이에 따라 명동대성당은 올해 "명동대성당 축성 1백주년 기념관"을
세우고 국제세미나를 여는 등 다채로운 사업을 마련한다.

"명동대성당 축성 1백주년 기념관"은 명동성당 주차장및 테니스코트 등
농성장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연건평 2천평규모로 세워진다.

예산은 약1백억원.기념관에는 성당과 문화관 소강당 도서.성물유통센터
만남의 장소 전시실 등이 들어서게 된다.

특히 전 가톨릭교회와 서울대교구및 기관 수도회에 사목행정 전반에 관해
알려주는 사목정보센터도 둔다.

장덕필 명동대성당 주임신부는 "명동대성당은 1백년의 연륜을 헤아리는
노후한 건물로 보수와 보존에 역점을 둬야할 문화재"라면서 "신자교육
장소가 부족하고 쾌적하지 못한 교회의 환경에 비춰볼 때 1백주년 기념관
건립은 시간을 다투는 화급한 일"이라고 밝혔다.

5월29일 1백주년 기념일에는 기념미사만 올리며 31일 주일에 한마당
잔치를 펼친다.

이 축제에는 이곳에서 농성한 사람들과 불우이웃 노인들이 초청된다.

5월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의 독주회, 11월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의
독주회를 성당안에서 개최한다.

11월엔 사목심포지엄도 연다.

명동대성당은 1892년 착공됐으며 코스트신부가 설계와 공사감독을 맡았다.

1898년 5월29일 축성식과 함께 한국의 수성인인 마리아에게 봉헌됐다.

첫성당미사 때는 신자수가 1백여명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4만5천명에 이른다.

명동대성당은 한국현대사의 한 증명처라고 할 만큼 선교의 터전이자
민주화의 상징, 쫓기는 이들의 피난처로 자리잡아왔다.

1900년 용산 신학교로부터 병인박해때 순교한 사람들의 유해를 받아
지하성당에 안치했으며, 1925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 박일규 신부가
보좌신부로, 1942년에는 이기준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그해 12월20일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주교가 취임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성당명을 종현대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꿨다.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대성당 축성 1백주년을 위한 기도문을 내고 "축성
1백주년을 준비하는 저희로 하여금 순교성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순교자들의 후손다운 삶을 살게 하고 2000년대 복음화를 준비하는 한국
교회안에서 모범적인 민족선교의 장이 되게 하시고 그 결실을 주님께
봉헌하게 하소서"라고 밝혔다.

< 오춘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