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경제는 대외적으로는 신인도 하락에 따른 외채회수로 일부
금융기관이 외화부도를 낼 가능성이 있고, 대내적으로는 금융체계의
마비에 따른 돈 흐름의 중단으로 상당수의 금융기관과 기업이 원화부도를
낼 가능성이 있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우선 되도록 많은 수의 금융기관과 기업을 살리기 위해
땜질식 처방을 쓰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기존정책을 포기하는 식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이와같은 방식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근본적인 경제체질 개선을 더욱 어렵게 하는 정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향후 정책은 "우선 살려놓고 보기"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썩은 부분 도려내기"에 주력해야 한다.

IMF가 재정과 통화긴축을 요구한 이유도, 돈을 더 찍어내는 등 손쉬운
방법으로 부실 금융기관과 기업을 지원하여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채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사전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금융기관과 기업중 부실한 것과 건실한 것을 가려내는 작업은 IMF나
해외투자자들이 요구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다.

지금까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온 기업이나 투자의 타당성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책임을
물어야 향후에 국민경제를 볼모로 사업을 확장하는 행위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경제의 안정을 위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정부가 매입해줄
수는 있지만, 이 때에도 납세자들이 자체 회생가능성이 희박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까지 보전해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

또 외채의 경우도 국가채무가 아닌 민간채무를 정부, 즉 국민이 대신
갚아줄 필요는 없다.

민간기업과 금융기관은 해외자산을 매각하고 채권자들과 협상하는 등
자구노력을 해야 하며, 부실의 정도가 심각하다면 도태되어야 한다.

부실 민간기업과 금융기관을 위해 국가가 모라토리엄(상환 유예)선언을
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며 건실한 기업과 금융기관은 물론 국민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최악의 선택이다.

태국의 경우 최근 56개의 금융회사를 폐쇄하면서 16개 기관은 채권자들이
우선변제 순위에 따라 "빚잔치"를 하도록 했고, 나머지 40개 기관의
외채는 바트화로 표시된 저금리 채권을 발행하여 해결한바 있다.

그렇다면 "부실"과 "건실"을 가려내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선 금융기관의 경우 IMF가 제시한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율을
평가지표로 삼을수 있을 것이다.

BIS기준 자기자본율은 자기자본을 분자로 하고 위험가중치를 반영한
자산을 분모로 하는 비율로,금융기관의 무리한 대출 확장을 견제하는
구실을 한다.

정부는 기업부도를 방지하기 위해 금융기관에 대출금 회수를 자제하라고
압력을 넣을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에 대한 우선주 출자나 후순위채 인수를
통해 대출여력이 생길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모든 금융기관을 살리려고 하지 말고, 이미 자기
자본이 상당히 줄어들어 IMF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막대한
재원이 소요될 부실 금융기관은 매각 또는 폐쇄하고,조금만 지원해줘도
상당한 대출여력이 생길 우량 금융기관들이 혜택을 받을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의 경우 건실성은 우량 금융기관이 평가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일괄적으로 기업의 채무상환을 유예해주는 것은 구조조정을 늦출
뿐이고, 지금까지 건실하게 운영되어온 우량 종금사와 은행들이 증자를
통해 대출여력을 확보하면 그들에게 평가를 위임하여 부실기업과
건실기업을 가려내는 것이 경제체질을 개선하는 지름길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부실한 기업의 도태없이는 건실한 기업의 성장과
새로운 기업의 창업이 지연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정치인과 관료들은 실언을 한번씩 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실업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여 말에 신중을 기하는 한편, 관주도의
경제와 관치금융을 일소하려는 우리의 개혁의지가 확고함을 과감한 행동을
통해 대내외에 입증해야 한다.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IMF의 자금지원을 단계적으로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민간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외화부도 위기를 가중시켜 궁극적으로는 대규모 원화부도를 촉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모두 다 살릴수도 없고 모두 다 살려서도 안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부실"과 "건실"을 가려내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임원혁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