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한국경제보고서 어디를 봐도 재벌해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언론이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습니다"

5일 오전 시무식 직후 기자실에 들린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의 첫마디는 이랬다.

신정부의 대기업정책이 아직 뚜껑도 열리기 전에 "재벌해체"로 해석되고
있는데 대해 우려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비단 손부회장 뿐만 아니라 신년을 맞는 재계의 마음은 무겁다.

이날 오전 취임 2개월내에 재벌개혁조치를 단행하겠다고 했다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신년사 내용이 전해졌고 이에 앞서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그룹 상호지급보증 관행을 조기에 근절시키겠다는 방침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손부회장은 새정부와 IMF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재벌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기업경영의 "투명성"이라며 재계는 결합재무제표작성, 공개기업
외부감시 강화, 사외이사제 실시 등 투명한 경영정보제공을 위한 조치에
이미 착수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기업은 경제를 살리는 엔진"이라며 "새정부의 개혁정책은 모든
것을 국제 수준으로 맞춰가자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기업경영구조를
개편하자는 얘기는 절대 아닐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니까 재계는 새정부가 IMF와의 협약을 지켜나가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경제정책을 마련하고 있는 과정에서 자칫 기업책임론이
"반기업주의"로 확대 재생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경제위기의 원인을 기업의 책임으로만 돌릴 경우 기업의욕은 땅에
떨어지고 고용조정 등 기업의 구조조정도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다.

더구나 반기업주의가 팽배한 상태에서는 정부의 경제정책이 자칫 탄력성을
잃을 가능성이 높기도 하다.

이를테면 공정위가 추진중인 상호지급보증 해소 문제가 그렇다.

자금경색이 극에 달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보증초과분을 해소할
방법이 없는 데도 반기업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이런 현실이 기업들의
변명으로만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정책은 경직되게 운용될 수 밖에 없고 기업은 수출이나 영업 등
본연의 활동보다는 살아남기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재계가 "우는 소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기상황에서 신정부가 내놓은 대기업 정책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동안 정부규제와 관치금융하에서 옴쭉달싹 못했던 데 비하면 모든 것을
선진국 수준, 국제관행에 맞추겠다는 새정부의 방침이 기업경영 정상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전경련 관계자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 가운데 기업의 인수.합병에
대한 제도적 장치 마련, 부실계열사 정리, 지주회사설립 허용, 출자총액제한
폐지 등은 그동안 재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오던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 오해하듯 정부가 대기업그룹을 벼랑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설명을 달았다.

모그룹 관계자는 이와 관련,"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노력을
벌여갈 것"이라며 "경영환경을 국제수준화하려는 정부나 IMF의 방향은 고통이
다소 수반되지만 결국 우리 기업이 가야할 길"이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재계는 그러니까 아직 뚜껑도 열리지 않은 신정부의 대기업정책이
일방으로 몰아붙여지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갖고 있으면서도 새정부가
자율적인 구조조정의 호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셈이다.

손부회장이 이날 "새정부는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기업을 변하게 하려는 정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