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우교수의 '신창조론'] (3) '현자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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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사.하이터치 공동기획-
이면우 <서울대 교수>
필자는 4~5년 전부터 우리 주위의 젊은이들에게 세속적인 현자를
멀리하라고 이르고 다닌다.
불교의 가르침에 현자의 도리를 알려주는 계율이 있다.
눈을 가리고 사악한 것을 보지 않고(See noevil), 귀를 막고 사악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Hear no evil), 입을 막고 사악한 말을 하지 않는(Speak no
evil) 노승의 그림이나 조각품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현자들은 어떠한가?
본인이 책임질 위험이 있는 일은 보지 말고(See no risk), 본인이
부담스러운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듣지 말며(Hear no risk),
개인 영달에 도움이 안되는 일은 아예 발설하지도 말라(Speak no risk)는
원칙에 충실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현자들은 시류에 민감하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강조하며 원칙보다는 처세능력을 가장 큰 덕목으로
강조한다.
이들은 목숨이 길고 관운이 끈질기다.
지난 30년간 그들은 칠전팔기의 투지를 불태우며 권좌를 드나들었다.
정부의 관료들은 현자이다.
제아무리 국가의 존망에 큰 영향을 미칠 사안이라도 본인에게 부담스러운
내용은 외면한다.
상사가 저지르는 부조리는 못본 척하고,민원이 죽 끓듯 해도 부처가 책임질
일은 못들은 척하며,관료사회의 잘못된 관행도 본인에게 이익이 없으면
지적하지 않는다.
기업에도 현자들이 많다.
위험한 일, 불확실한 일, 책임질 일들은 모두 안건에서 보류한다.
다음 회의 안건으로 미루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의의 결론이 없을 수야 없지 않는가?
그래서 회의록에는 여러 부서의 의견을 청취하였고, 좋은 제안이 많이
있었고, 모두 힘을 합쳐 더욱 잘하자고 결정하였다고 기록한다.
현자들인 것이다.
기업체의 회장중에도 현자가 많다.
몇번이나 방향을 제시했는데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한가지 알수 없는 일이 있다.
카리스마가 있고 과감한 결단력과 휘몰아치는 추진력으로 무장한
회장아닌가?
못본 척, 못들은 척, 묵묵부답인 기업의 현자들을 왜 그냥 보고만
있는가?
회장도 현자이기 때문이다.
언론에도 현자들이 많이 있다.
사방에 취재원이 널려 있고, 각계 각층을 두루 섭렵하는 기자들이 우리
외환보유고가 악화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청문회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던 사안, 정부.은행.재벌의 정경유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고 한탄하는 사설도 보았다.
왜 미리 말하지 못하였는가?아마도 현자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Speak no risk)이다.
최근의 외환위기 사태로 경제관료중에도 현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도 국민에게 보고될 내용이 여러차례 수정되어
발표되었다.
회의록이 누설되었다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IMF라는 일개 금융기관이 들어오니까 현자들의 행진이 난조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자들은 구호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구호는 대개 세가지로 압축될수 있다.
첫째는 합심전력, 둘째는 일치단결, 세번째는 일사불란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구호가 아닌가?
합심전력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정보혁명이 일어나고 국제화 시대가 전개되며,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이 시점은 급류타기와 같은 상황이다.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는 배에서 합심전력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합심전력 하겠는가?
일치단결이란 무엇인가?
변혁의 시대에 모든 것이 제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다양하게 변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일치단결할 수 있겠는가?
전원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않고 모두 모여 움추리고만
있을 것이다.
일사불란이란 무엇인가?
사방에서 정체를 알수 없는 적들이 우리를 일제히 공격하는 시대이다.
우리가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면 어떻게 되는가?
아마도 전멸할 것이다.
결국 현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장대일 것이다.
합심전력하고, 일치단결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구호를 좋아하는가?
이런 구호를 외치고 있으면 별다른 대책없이도 시간을 때우며 국민을
바쁘게 만들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자들은 결단의 시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깨닫고 있다.
중대한 사안의 대책을 발표하는 정부보고에서 자주 인용되는 현자들의
구호가 있다.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말인가?
"미치겠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은 가만히 있겠다"는 말인 것이다.
가만히 있겠다고 말하면 국민들이 우습게 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겠다", "상대방의 행동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결국은 누워서 잠들어 버리고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하더니 잠시 후에는 자리를 피해버리는 것이다.
얼마전에 출간한 책자에서 필자는 우리사회의 현자의 종류를 대략 세가지로
분류한 적이 있다.
첫째, 경력형 현자가 있다.
이들은 부서를 두루 섭렵하였고 대과없이 모든 부서의 임무를 다쳤다.
경력형 현자의 목표는 무엇인가?
어느 한자리에 취임하는 즉시 그 다음 자리로 옮길 준비를 하는것이다.
과거에 추진하였던 업무를 평가할 필요도 없고 무리하며 새로운 사업을
전개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에는 경력형 현자가 제일 많다.
두번째 현자는 인격형이다.
이들은 담당업무의 근본기능보다는 원만한 인간관계 구축에 주력한다.
상사에게 인정받고 부하직원들에게 존경받고자 행동한다.
사리를 따지기 전에 포용력을 강조하고 잘잘못을 가리기전에 너그러움을
중요시한다.
인격형 현자들이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조직의 훈훈한 분위기이다.
시급히 척결해야할 문제들이 산같이 쌓여있는데도 인화단결만이
위기극복의 열쇠라고 주장한다.
세번째로 우리사회에서 가장 많이 필요하지만 가장 찾기 힘든 그룹이
기록형 현자이다.
이들은 수선스럽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주변에 있는 현자들의 체면을
손상시킬 일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
일을 많이 벌이다보니 그 과정에서 실수도 있을것이고 어려운 일을
추진하다보니 실패하는 일도 간혹 있을것이다.
그러면 때를 기다리던 세속의 현자들이 일시에 공격한다.
비리 내용을 매스컴에 흘리고 익명으로 투서하며 감사원에 제보한다.
열가지 일을 해서 아홉개를 성사시키고 한개를 실패한 사람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이다.
아무일도 안하는 사람은 실수할 리가 없다.
실패한 적도 없고 실수한 적도 없는 사람들은 현자클럽을 만들어 회원을
모집한다.
주변의 대세가 이러다보니 망설이며 주위를 살피던 신진기예들도 하나 둘
노회한 현자클럽에 합류하기 시작한다.
대학생들은 졸업하면서 현자가 된다.
이들은 대기업 일류회사를 선호한다.
왜들 그렇게 한정된 대기업으로만 몰려드느냐고 물었더니 안정된 직장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 안정된 직장이 있는가?
고등학생들도 현자가 되고 싶어한다.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왜 이 대학을 택했느냐고 물어봤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대학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탓할 내용은 아니지만 어린 현자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현자가 되어가다보니 끝까지 현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우직한
사람들은 낙오자로 취급될 것이다.
주변머리가 없는 생활의 부적격자로, 성격 파탄자로, 편협한 이상주의자로
낙인 찍힐 것이다.
그들의 부인과 자녀들도 존경을 보류할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사느냐?"고 질책을 하면서 말이다.
일전에 청문회에 나왔던 사람은 그의 상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검찰에
출두하였다.
검찰의 추궁을 이기지 못한 그는 상사의 비리를 인정하고 풀려났다.
집에 돌아온 그는 며칠간을 고민하다가 끝내 자살을 하고야 말았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그는 현자의 계율을 위반하였던 것이다.
보고도 못본 척, 듣고도 못들은 척, 할말이 있어도 벙어리인 척 했어야
하는데 저간의 사정을 말해버린 것(Speak no risk)이다.
선진국에서는 스스로 고발했어야 할 일을 수사기관의 조사에서 피치 못해
말한 것에 자책감을 갖고 끝내 목숨을 끊고야 만 것이다.
현자들이 이끄는 우리사회는 이만큼 상식이 마비된 것이다.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이 단절되는 것은 신경마비이며, 시급한 국가과제의
추진을 보류하는 것은 동맥경화증이며, 이러한 위기상태에 있으면서도
자구노력을 외면하는 것은 뇌졸증이다.
현자들이 이끄는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현자의 행진을 중단시켜야 한다.
선진국의 현자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언뜻 보아 현자들 같지가 않다.
보는 대로 지적하고, 듣는 대로 수정하며,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
인텔사의 앤디 그로보 회장은 "경쟁사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우리회사
제품을 죽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기업에 보편화된 맹신적 애사심이 결여된 발언이다.
인텔사가 개발한 첨단 반도체 부품은 당분간 경쟁상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 팔린다고 안주하고 이익이 좀 난다고 도취되어 쉬고 있다
보면 기회를 노리던 경쟁사가 어는 순간에 덤벼들지 않겠는가?
제너럴일렉트릭사의 잭 웰치 회장은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가장 바람직한 경영자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는
유형이다.
이러한 경영자가 이끄는 기업은 변혁의 시대에도 여전히 큰 성장을 보여줄
것이다.
두번째 유형은 변화를 강조하기는 하나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유형이다.
조직의 구성원으로는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유능한 경영자는 아닐
것이다.
세번째 유형은 변화를 싫어하지만 목표만큼은 꼭 달성하는 유형이다.
이런 경영자가 맡고 있는 회사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양의 길을 걸을
것이다.
네번째 유형의 경영자는 변화도 거부하고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는
유형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들은 부적격자로 판정이 날 것이고 도태될 것이므로
큰 걱정이 없다.
잭 웰치 회장 밑에서는 첫번째 유형의 현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한국의 현자들은 대개 세번째 유형에 속할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가치관은 취약하지만 눈에 잘 보이는 목표만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한다.
그러나 그들은 꼭 달성할 수 있는 것만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현자들로 둘러싸인 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하는가?
멕시코는 금융파탄의 위기를 맞자 경제부처를 관장하고 있던 현자들을
무시하고 우직한 사람 세명을 금융감독원에 기용하였다.
이들은 먹이사슬에 가담한 적도 없고, 관행에도 익숙하지 않으며, 오래된
공조관계에서 제외되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금융감독원에서 상식대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개 은행중 10개 은행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거나 국내 은행에
합병되었다.
사전예고 없이 30여명의 감사요원을 대형은행에 투입하여 경영정상화를
법대로 점검하였다.
현자가 아닌 사람들이 국가위기를 구한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7일자).
이면우 <서울대 교수>
필자는 4~5년 전부터 우리 주위의 젊은이들에게 세속적인 현자를
멀리하라고 이르고 다닌다.
불교의 가르침에 현자의 도리를 알려주는 계율이 있다.
눈을 가리고 사악한 것을 보지 않고(See noevil), 귀를 막고 사악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Hear no evil), 입을 막고 사악한 말을 하지 않는(Speak no
evil) 노승의 그림이나 조각품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현자들은 어떠한가?
본인이 책임질 위험이 있는 일은 보지 말고(See no risk), 본인이
부담스러운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듣지 말며(Hear no risk),
개인 영달에 도움이 안되는 일은 아예 발설하지도 말라(Speak no risk)는
원칙에 충실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현자들은 시류에 민감하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강조하며 원칙보다는 처세능력을 가장 큰 덕목으로
강조한다.
이들은 목숨이 길고 관운이 끈질기다.
지난 30년간 그들은 칠전팔기의 투지를 불태우며 권좌를 드나들었다.
정부의 관료들은 현자이다.
제아무리 국가의 존망에 큰 영향을 미칠 사안이라도 본인에게 부담스러운
내용은 외면한다.
상사가 저지르는 부조리는 못본 척하고,민원이 죽 끓듯 해도 부처가 책임질
일은 못들은 척하며,관료사회의 잘못된 관행도 본인에게 이익이 없으면
지적하지 않는다.
기업에도 현자들이 많다.
위험한 일, 불확실한 일, 책임질 일들은 모두 안건에서 보류한다.
다음 회의 안건으로 미루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의의 결론이 없을 수야 없지 않는가?
그래서 회의록에는 여러 부서의 의견을 청취하였고, 좋은 제안이 많이
있었고, 모두 힘을 합쳐 더욱 잘하자고 결정하였다고 기록한다.
현자들인 것이다.
기업체의 회장중에도 현자가 많다.
몇번이나 방향을 제시했는데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한가지 알수 없는 일이 있다.
카리스마가 있고 과감한 결단력과 휘몰아치는 추진력으로 무장한
회장아닌가?
못본 척, 못들은 척, 묵묵부답인 기업의 현자들을 왜 그냥 보고만
있는가?
회장도 현자이기 때문이다.
언론에도 현자들이 많이 있다.
사방에 취재원이 널려 있고, 각계 각층을 두루 섭렵하는 기자들이 우리
외환보유고가 악화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청문회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던 사안, 정부.은행.재벌의 정경유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고 한탄하는 사설도 보았다.
왜 미리 말하지 못하였는가?아마도 현자의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Speak no risk)이다.
최근의 외환위기 사태로 경제관료중에도 현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도 국민에게 보고될 내용이 여러차례 수정되어
발표되었다.
회의록이 누설되었다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IMF라는 일개 금융기관이 들어오니까 현자들의 행진이 난조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자들은 구호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구호는 대개 세가지로 압축될수 있다.
첫째는 합심전력, 둘째는 일치단결, 세번째는 일사불란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구호가 아닌가?
합심전력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정보혁명이 일어나고 국제화 시대가 전개되며,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이 시점은 급류타기와 같은 상황이다.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는 배에서 합심전력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합심전력 하겠는가?
일치단결이란 무엇인가?
변혁의 시대에 모든 것이 제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다양하게 변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일치단결할 수 있겠는가?
전원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않고 모두 모여 움추리고만
있을 것이다.
일사불란이란 무엇인가?
사방에서 정체를 알수 없는 적들이 우리를 일제히 공격하는 시대이다.
우리가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면 어떻게 되는가?
아마도 전멸할 것이다.
결국 현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장대일 것이다.
합심전력하고, 일치단결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구호를 좋아하는가?
이런 구호를 외치고 있으면 별다른 대책없이도 시간을 때우며 국민을
바쁘게 만들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자들은 결단의 시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깨닫고 있다.
중대한 사안의 대책을 발표하는 정부보고에서 자주 인용되는 현자들의
구호가 있다.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말인가?
"미치겠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선은 가만히 있겠다"는 말인 것이다.
가만히 있겠다고 말하면 국민들이 우습게 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겠다", "상대방의 행동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결국은 누워서 잠들어 버리고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하더니 잠시 후에는 자리를 피해버리는 것이다.
얼마전에 출간한 책자에서 필자는 우리사회의 현자의 종류를 대략 세가지로
분류한 적이 있다.
첫째, 경력형 현자가 있다.
이들은 부서를 두루 섭렵하였고 대과없이 모든 부서의 임무를 다쳤다.
경력형 현자의 목표는 무엇인가?
어느 한자리에 취임하는 즉시 그 다음 자리로 옮길 준비를 하는것이다.
과거에 추진하였던 업무를 평가할 필요도 없고 무리하며 새로운 사업을
전개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에는 경력형 현자가 제일 많다.
두번째 현자는 인격형이다.
이들은 담당업무의 근본기능보다는 원만한 인간관계 구축에 주력한다.
상사에게 인정받고 부하직원들에게 존경받고자 행동한다.
사리를 따지기 전에 포용력을 강조하고 잘잘못을 가리기전에 너그러움을
중요시한다.
인격형 현자들이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조직의 훈훈한 분위기이다.
시급히 척결해야할 문제들이 산같이 쌓여있는데도 인화단결만이
위기극복의 열쇠라고 주장한다.
세번째로 우리사회에서 가장 많이 필요하지만 가장 찾기 힘든 그룹이
기록형 현자이다.
이들은 수선스럽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주변에 있는 현자들의 체면을
손상시킬 일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
일을 많이 벌이다보니 그 과정에서 실수도 있을것이고 어려운 일을
추진하다보니 실패하는 일도 간혹 있을것이다.
그러면 때를 기다리던 세속의 현자들이 일시에 공격한다.
비리 내용을 매스컴에 흘리고 익명으로 투서하며 감사원에 제보한다.
열가지 일을 해서 아홉개를 성사시키고 한개를 실패한 사람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이다.
아무일도 안하는 사람은 실수할 리가 없다.
실패한 적도 없고 실수한 적도 없는 사람들은 현자클럽을 만들어 회원을
모집한다.
주변의 대세가 이러다보니 망설이며 주위를 살피던 신진기예들도 하나 둘
노회한 현자클럽에 합류하기 시작한다.
대학생들은 졸업하면서 현자가 된다.
이들은 대기업 일류회사를 선호한다.
왜들 그렇게 한정된 대기업으로만 몰려드느냐고 물었더니 안정된 직장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 안정된 직장이 있는가?
고등학생들도 현자가 되고 싶어한다.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왜 이 대학을 택했느냐고 물어봤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대학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탓할 내용은 아니지만 어린 현자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현자가 되어가다보니 끝까지 현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우직한
사람들은 낙오자로 취급될 것이다.
주변머리가 없는 생활의 부적격자로, 성격 파탄자로, 편협한 이상주의자로
낙인 찍힐 것이다.
그들의 부인과 자녀들도 존경을 보류할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사느냐?"고 질책을 하면서 말이다.
일전에 청문회에 나왔던 사람은 그의 상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검찰에
출두하였다.
검찰의 추궁을 이기지 못한 그는 상사의 비리를 인정하고 풀려났다.
집에 돌아온 그는 며칠간을 고민하다가 끝내 자살을 하고야 말았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그는 현자의 계율을 위반하였던 것이다.
보고도 못본 척, 듣고도 못들은 척, 할말이 있어도 벙어리인 척 했어야
하는데 저간의 사정을 말해버린 것(Speak no risk)이다.
선진국에서는 스스로 고발했어야 할 일을 수사기관의 조사에서 피치 못해
말한 것에 자책감을 갖고 끝내 목숨을 끊고야 만 것이다.
현자들이 이끄는 우리사회는 이만큼 상식이 마비된 것이다.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이 단절되는 것은 신경마비이며, 시급한 국가과제의
추진을 보류하는 것은 동맥경화증이며, 이러한 위기상태에 있으면서도
자구노력을 외면하는 것은 뇌졸증이다.
현자들이 이끄는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현자의 행진을 중단시켜야 한다.
선진국의 현자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언뜻 보아 현자들 같지가 않다.
보는 대로 지적하고, 듣는 대로 수정하며,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
인텔사의 앤디 그로보 회장은 "경쟁사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우리회사
제품을 죽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기업에 보편화된 맹신적 애사심이 결여된 발언이다.
인텔사가 개발한 첨단 반도체 부품은 당분간 경쟁상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 팔린다고 안주하고 이익이 좀 난다고 도취되어 쉬고 있다
보면 기회를 노리던 경쟁사가 어는 순간에 덤벼들지 않겠는가?
제너럴일렉트릭사의 잭 웰치 회장은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가장 바람직한 경영자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는
유형이다.
이러한 경영자가 이끄는 기업은 변혁의 시대에도 여전히 큰 성장을 보여줄
것이다.
두번째 유형은 변화를 강조하기는 하나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유형이다.
조직의 구성원으로는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유능한 경영자는 아닐
것이다.
세번째 유형은 변화를 싫어하지만 목표만큼은 꼭 달성하는 유형이다.
이런 경영자가 맡고 있는 회사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양의 길을 걸을
것이다.
네번째 유형의 경영자는 변화도 거부하고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는
유형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들은 부적격자로 판정이 날 것이고 도태될 것이므로
큰 걱정이 없다.
잭 웰치 회장 밑에서는 첫번째 유형의 현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한국의 현자들은 대개 세번째 유형에 속할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가치관은 취약하지만 눈에 잘 보이는 목표만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한다.
그러나 그들은 꼭 달성할 수 있는 것만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현자들로 둘러싸인 국가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하는가?
멕시코는 금융파탄의 위기를 맞자 경제부처를 관장하고 있던 현자들을
무시하고 우직한 사람 세명을 금융감독원에 기용하였다.
이들은 먹이사슬에 가담한 적도 없고, 관행에도 익숙하지 않으며, 오래된
공조관계에서 제외되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금융감독원에서 상식대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개 은행중 10개 은행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거나 국내 은행에
합병되었다.
사전예고 없이 30여명의 감사요원을 대형은행에 투입하여 경영정상화를
법대로 점검하였다.
현자가 아닌 사람들이 국가위기를 구한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