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이 제자리를 찾고 있다.

민족의 고유의상이면서도 서구화와 실용주의 바람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한복이 2~3년새 부쩍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거리를 메우기 시작
했다.

서울의 인사동과 명륜동 등 옛기운이 살아있는 거리에는 선이 고운 한복
차림을 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매장도 눈에 띄게 늘었다.

대학가에서도 마찬가지.

입는 사람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한때 서양드레스를 무색케 할 정도로 무턱대고 화려하고 풍성해졌던 한복
형태가 전통적인 모양을 되찾고 있다.

페티코트로 부풀렸던 치마는 다소곳하게 수그러들고 요란한 금박과 자수
대신 격식에 맞춘 작은 장식이 자리잡았다.

한복연구가들은 이런 변화에 대해 "한복의 아름다움이 인정받고 우리것의
소중함도 새삼 강조되는 증거"(한복연구가 허영)라고 말한다.

이같은 변화의 원인은 국민들의 전반적 인식변화와 시의적절한 조치 시행
이라는 2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복착용을 확산시킨 가장 큰 요인은 96년 12월 문화체육부의 "한복입는
날"선포였다.

매달 첫토요일에 한복을 입자는 운동은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기관
금융기관 학교 등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한복의 장점이 밝혀지면서 직원 유니폼을 편안한 개량한복으로 바꾼 곳도
여러군데 생겨났다.

이에 따라 문체부에서는 올해부터 한복입는 날을 월 1회에서 4회로 늘릴
것을 구상중이다(문화산업기획과 김재이 사무관).

한복을 입으면 고궁에 무료입장하게 한 제도 또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96년 12월 문체부는 한복을 한글 김치.불고기 석굴암.불국사 태권도와
함께 한국문화를 나타내는 CI(Corporate Identity, 이미지 통합작업)
상징물로 선정해 대외홍보도 강화하고 있다.

"한복입는 날" 지정은 7공화국 문체부 업적중 가장 성공적인 것의 하나로
꼽힌다.

지정 1년만에 생활한복의 시장규모는 2배로 늘었다.

한복관계자들은 이같은 성공의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국민들의 "우리것
되찾기"의식을 꼽는다.

강제성을 띠지도 않은 제도가 불과 1년동안 이렇게 전폭적인 호응을 얻게
된 데는 무르익은 국민정서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정서의 밑바탕에는 10여년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우리 옷.
정신 찾기운동이 자리잡고 있다.

소수에 의해 추진되던 "한복의 실용화"운동이 한복이 동아리유니폼으로
확산되고 축제의 인기상품으로 떠오르면서 자리를 잡은 것.

당시 학생들이 사회 중견으로 자리잡은 지금, 한복착용이 편리성 여부를
뛰어넘어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복의 확산에는 한복연구가뿐 아니라 일반디자이너도 일조했다.

디자이너 진태옥씨는 이화여대 최고지도자과정을 수료한 뒤 96년 학교측에
제의해 한복형태의 졸업가운을 디자인해 채택케 했다.

국사(한복감의 일종) 2겹 소재로 만든 도포형 가운은 "한국적이며 품위가
있다"는 칭찬속에 사용되고 있다.

디자이너 이영희씨는 미국 매털사에 바비인형용 한복을 디자인하고 제공해
세계 50여개국에 한복이 홍보되도록 했다.

"한복착용이야말로 의식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면서 자영업자
문화예술인 한의사 등에 국한됐던 착용층이 일부 직장인에게까지 확대됐다
(두레민족생활문화연구원 연성수 원장).

분위기가 성숙되자 각기 사업에만 바빴던 생활한복업체들도 "우리옷 사랑
본부"라는 홍보단체를 만들어 한복의 장점을 제대로 알리는데 힘을 모으고
있다.

"여럿이 함께"의 이한재 대표는 "IMF한파가 닥친 뒤 국민들의 우리옷
사랑이 더욱 강화된 느낌"이라고 전했다.

생활한복업체들은 28일 설을 맞아 활발한 한복알리기 행사도 준비중이다.

"질경이 우리옷"의 한복고쳐주기(17~27일), "우리들의 벗"의 "달러화로
한복판매"(19~27일, 2달러에 한복 상하1벌) 등이 대표적인 행사.

문화체육부는 일단 한복붐 조성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고 2단계로 한복
표준화작업을 마쳤다.

비싼 가격이 한복 확산의 걸림돌이라고 보고 기성복 제작을 위한 한복
표준체형표를 만들고 있는 것.

강순재(가톨릭대) 남윤지(서울대) 조효숙(경원대) 교수 등 7명의 위원들
에게 위촉해 97년말 표를 완성, 올해부터 업체들에 제공할 예정이다.

< 조정애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