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고광 <한국은행 금융 경제 연구소장 >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으로 국가부도사태는 일단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해외자본이 순조롭게 유입되지 않아 환율의 지나친
저평가와 고금리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환율안정을 위한 고금리정책이 지속될 경우 영세기업의 도산은 물론
건전기업까지 흑자도산하는 등 무더기 부도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바로 "금융기관 부실심화 -> 대외신인도 추가하락 -> 해외자본
유입부진"의 악순환을 초래함으로써 국가경제의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 IMF 권고수준 이상으로 금융및
실물부문의 구조조정을 조기에 가시화하여 국가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우리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
참여와 퇴출, 내외국인 차별없는 동등대우, 정책과 제도의 투명성확보라는
원칙아래 서둘러 개혁을 추진해달라는 것으로 요약될수 있다.

이와 같은 요구에 대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금융 정부 노동 기업의
개혁추진 프로그램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마련하여 이를 일관성있게
추진하는데 모든 정책적 역량을 모으는 일이다.

다가오는 21세기에 대비해서라도 우리의 경제체질을 근본부터 바꾼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할 때다.

과거의 정부주도적 패러다임은 이제 버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대신 질서있는 경쟁을 보장하는 진정한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하여
기술혁신과 효율에 의한 경제발전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질수 있는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경제운용에서 민간부문이 중심적 역할을 할수 있도록
정부의 경제적 간여를 최대한 줄이고 제도와 관행을 시장친화적으로
개편하는 한편 경제정책의 시계를 중장기화하고 투명화해야 한다.

시장경제가 효율성을 갖는 것은 가격기구와 경쟁의 상호연관을 바탕으로
시장이 효율적인 자원배분은 물론 여건변화에도 잘 대처할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쟁은 경제행위의 자유를 조절하며 경제발전의 주요 동인인
기술진보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국내기업은 물론 외국기업도 시장에 자유롭게 진입할수 있도록
서둘러 제도를 개선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정부의 잘못된 시장개입과 규제관행을 철폐하여 지대추구의
기회를 없앰으로써 인적 물적 자원이 토지투기 특혜금융 부정부패 등
영합거래(zero-sum arbitrage) 활동으로부터 정합(positive-sum)
생산활동으로 전환되도록 하여야 한다.

아울러 그동안 정부의 시장개입도구였던 관치금융을 청산하여
금융-자본시장 기능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금융기능 회복을 위한 금융개혁 관련법들이 지난 연말 국회를
통과하였지만 국내외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 보장, 정책대상 범위 등 여러
측면에서 미흡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바 이를 수용하는게 마땅하다고 본다.

공정한 경쟁질서와 관련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은 손실도 스스로
부담하여야 하는 자기책임원칙의 확립도 중요하다.

그동안 대기업들이 외형 확장위주의 투자에 성공하면 그 수익은 자신이
갖는 반면 실패할 경우의 손실은 특혜금융이나 조세혜택으로 일반국민에게
전가해왔다.

이제는 이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시장경제의 장점이 발휘되는 데는 건전한 자본주의 철학이 반드시
뒷받침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장경제를 발전시킨 선진국들은 검증된 경제논리에 그들 고유의
철학이나 윤리를 잘 융화시킴으로써 오늘과 같은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의 뢰프케가 말한 인본적 시장경제질서와 같이 경제운용에 인본적
요소를 강조하여 "국민 모두의 경제하려는 의지"를 북돋울 필요가 있다.

인본주의야말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서 필요한 동기부여, 협동심 고취,
팀워크정신의 앙양 등을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게 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편협된 혈연 지역주의 사고의 탈피로 사회전체의 일체감이나
유대감을 형성하여야 한다.

또한 사회에서 부와 소비의 많고 적음이 부끄러움의 기준이 되어 있는
현상을 바로잡아 건전한 직업의식과 근검절약 정신을 자랑스러움으로
키워나가야 할 때이다.

끝으로 고용안정및 국제수지균형까지 포함하는 거시경제의 안정을
구조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이는 물가안정에서부터 그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가가 안정되면 경쟁이 활성화되고 이는 다시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중장기적으로 고용도 늘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국제경쟁력을 향상시켜 무역수지개선에도 기여하게 된다.

한편 새로운 패러다임 아래에서는 정부역할을 최소화하면서 구조조정과
분배에 주력하는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

아울러 거시정책 수단으로서의 경기조절기능도 살리는 지혜가 요구된다.

조세면에서는 복잡한 체계를 간소화하고 세부담의 형평성과 조세행정의
투명성을 길러나가야 한다.

그리고 인본적 요소의 강화를 통한 노사관계의 안정은 물론 지속적
교육개혁으로 창조적이며 확고한 민주시민정신을 가진 인력을 창출하는데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