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우교수의 '신창조론'] (11) '국제화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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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신문사.하이터치 공동기획 -
이면우 < 서울대 교수 >
옛 속담에 "이불속에서 활개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마치 비닐하우스 안에서 세상 밖을 내다보며 좁은 소견으로 이것
저것을 추측하려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제회의에서 만난 홍콩은행장은 필자가 잘 아는 기업인을 가리켜 "한국인
치고는 도전적"이라고 하였다.
그의 은행을 찾는 한국기업인들은 대부분 위험부담이 작고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사업만을 찾는다고 하였다.
워싱턴에서 만난 경제학자는 그가 만났던 정부관리를 평하며 "한국인치고는
솔직한 편"이라고 하였다.
그는 비판을 싫어하는 관료들을 많이 만나보았을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온 연구소장은 그와 토론하였던 교수 이름을 대며 "한국인
치고는 토론에 적극적"이라고 하였다.
좀처럼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 한국 대표들을 많이 보았나 보다.
"한국인치고는"이란 무엇인가.
이들이 보는 한국인 초상은 어떠한가.
미국친구의 부탁으로 한국을 방문한 기업인을 안내한 적이 있었다.
그의 눈에는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차량이 많이 띄었나 보다.
그는 한국같이 잘사는 나라가 왜 사회의 기본계약을 지키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위대한 한국인이라는 장식을 붙인 차가 지나가자 그는 그 뜻을 물었다.
그 뜻을 설명한 직후 차안의 젊은이는 침을 뱉으며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가 본 위대한 한국인은 공중위생도덕이 부족하였다.
시내 호텔앞에서 택시 바가지요금에 항의하던 한 외국인은 필자에게 "이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한국은 크게 발전하지 못할 것"
이란 말을 운전기사에게 통역해 달라고 하였다.
국제회의에서 자주 만났던 미국인 교수는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웠었다고 하였다.
"나"의 생각은 이야기하지 않으며 "국가와 경제발전"에 관한 발언이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더라고 하였다.
한국인같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유럽에서 온 대학생 연수단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인상이 어떠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하였다.
그간 한국인을 많이 만나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자꾸만 반복해 묻길래 한국인의 첫인상은 매우
좋으며 모두 친절하다고 칭찬하였더니 그제서야 흡족해 하더라는 것이다.
한강에 있는 다리가 무너지던 해에 서울에서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었다.
필자는 미국인 노교수부부와 다리를 건널 기회가 많았다.
잠수교를 지날 때 뒷자석에 앉았던 노교수가 부인을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하였다.
"여보, 이 다리는 안전한 다리라고 들었소"
한국을 소개하는 관광책자를 독파하고 온 친구가 있었다.
그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긴장하였다.
물을 마실 때에도 이 물은 괜찮은 물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외국을 여행할 때 여러가지 유의사항을 듣는다.
터널은 공기가 나쁘고 최근에 다리가 무너진 곳이 있으며 식수오염도가
높은 나라라고 하면 여러분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미국행 비행기 속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의류수입업자와 장시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사업가로서 한국인은 대하기가 매우 벅찬 상대라고 하였다.
그와 오랜 관계를 가진 한 의류회사가 약속한 날짜에 물건을 납품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주문량이 밀려 그보다 나중에 계약한 회사에 먼저
납품하였다는 것이다.
항의하였더니 오랜 친분관계가 있는 사이여서 이해해줄 줄 알았다고
하더란다.
그는 물었다.
"한국인들은 친분이 두터우면 사업상의 계약을 소홀히 생각하는가"
우리 기업이 30년동안 단골이 없는 이유를 짐작할 듯 하였다.
해외에서 핵심부품을 수입하여 제품을 만들어 팔던 회사는 로열티를 적게
지불하고자 제품 매출액을 낮게 책정하였다.
상대 기업에서는 핵심부품을 사간 숫자가 있으니 매출액이 이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매출액이 정말로 적었다면 재고로 남아있는 핵심부품 수를 세어보자고
하였다.
그 회사는 실제 매출액에 대한 로열티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문제를 해결하였다.
유럽 전자전시회에서 만난 외국회사의 임원은 한국기업에서 파견된
관람자가 전시장에 들어오면 긴장한다고 하였다.
전시된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험하게 다루기 일쑤이며 장식품을
떼어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였다.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인의 초상은 어떠한가.
우리 기업인들의 국제화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필자가 들었던 단편적인 일화를 몇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무역업을 하는 미국회사 회장은 우리 기업인들의 성격이 조급하다고
하였다.
상대방을 알고 싶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건네보았으나 대화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 계약체결로 이야기를 몰아가더라고 하였다.
믿을만한가, 같이 사업을 할 만한 사람인가가 궁금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계약에만 온 신경이 쏠려있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벤처회사 사장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한국에서 방문한 사장을 일요일에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장은 자신외에도 여러명의 임원을 대동하고 정장차림으로 방문하였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그는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의 부인이 손님들이 앉을 의자를 나르는데 모두 서서 보고만 있었다고
하였다.
미국 관습으로는 도왔어야 했다.
사장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만 앉으려고 하였고 앉는 순서도 직급을
따르더라고 하였다.
경직된 사람들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사장이 이야기하는 것을 임원들이 받아 적더라고 하였다.
백번도 더 들었을 이야기인데 왜 적는가.
이야기를 받아 적으니 조심스러워 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더라고
하였다.
미국경찰은 현장에서 잡힌 범인에게도 인권보호 차원에서 말조심을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경고하지 않는가!
디트로이트에 있는 회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회장과 함께 7명의 임원이 회사를 방문하였는데 회장 이외에는 별로 말이
없더라고 하였다.
꽤 궁금했을 것이다.
경호원들인가.
그 회장은 자랑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남의 기술과 설비로 값싼 제품을 많이 판 것이 무슨 큰 자랑인가.
그 회장은 합작의 조건으로 경영권을 요구하였다.
사업계획을 물었더니 "기어코 성공시키고야 말겠다"고만 하더란다.
의지는 강한데 비전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정중히 합작추진을 거절하였다.
해외지사는 국제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해외지사는 어떻게 운영하여야 할 것인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등반가는 그의 등반 기술이 제아무리 좋더라도
네팔인 셰르파의 안내와 조언을 따른다.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사냥인은 그의 사냥기술이 제아무리 좋더라도 사파리
안내인의 도움을 받는다.
이것이 국제화의 지혜이다.
아무리 경영능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해당지역 전문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우리 관습만을 주장하다면 그 기업의 국제화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회장과의 대화를 기록하려면 임원들, 일요일에 정장차림으로 가정집을
방문한 사장단은 현지인 전문가로부터 미국의 생활관습에 대해 조언을
받았더라면 훨씬 더 좋은 상담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의 국제화 수준이 마치 화전민 마을의 비닐하우스
에서나 통용되는 관습이 바깥 세상에서도 통할 줄 알았다가 망신을 당한
사연들이다.
한때 해외관광이 부쩍 늘었었다.
관광객들은 김포공항에서 모여 좌석을 나란히 배정받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마중나온 한국인 안내인을 만난다.
교포가 운영하는 호텔에 투숙하고,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교포
가게에서 선물을 산다.
이들의 기념사진을 보면 온통 한국관광객뿐이다.
이런 관광을 수십번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런 관광을 비닐튜브 관광이라고 부른다.
비닐튜브속을 지나며 바깥 세상을 대충 훑어보고 오기 때문이다.
비닐튜브출장이라는 것도 있다.
해외교포들이 모여사는 곳의 식품점에 가보면 주변가게보다 조금씩 비싸다.
그래서 다른 교포에게 물어 보았다.
억울하지 않으냐.
그는 커튼 가게를 하는 사람인데 피장파장이라고 하였다.
그 식품가게 주인이 와 커튼을 맞추면 그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하였다.
이민을 갈 때 비닐하우스도 가져간 것이다.
국제화는 왜 필요한가.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교류가 필요하며, 교류가 성립되려면 서로 주고 받는 것, 사고 파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인기있는 교류 대상인가.
해외언론이 보는 한국은 어떠한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관료는 정직하지 못하며, 통계보고는 믿음직스럽지
않다.
각료들은 너무 자주 바뀌어 이름조차 외우기 힘들다.
기업 경영은 투명하지 못하고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으며 계약이행
여부도 확실치 않다.
내수가격보다 싼 수출품은 덤핑 의혹을 받는다.
남의 것은 사지 않고 자기 것만 팔고자 한다.
현자의 행진을 비판하면 외세의 간섭이라고 흥분하고 화전민 마을을
지적하면 국산품 애용운동이 벌어진다.
외국회사와 협의는 많아도 결정되는 사안은 드물다.
꽃마을이 연장된 것이다.
외국인에 비친 우리는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다.
만나서 부담스러운 사람은 어떻게 대하는가.
안만날 것이다.
국제화에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국제화의 대책수립은 지엽적인 영어교육으로 대체되었다.
국제화란 남의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주는 것은 없으면서 받으려고만 하는 억지는 통용될 수 없다.
과거에는 경제력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돈이 없다는 것을 전세계가 알고 있지 않는가.
만일 줄 것이 없이 받고자만 한다면 이는 국제협력이 아니라 국제구걸이며,
구걸은 모욕과 멸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산업구조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패러다임도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비닐하우스의 모판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올가을 수확을 꿈꾸며 국제화의 모내기에 착수하는 것이다.
모내기 운동은 다음의 3대 원칙하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첫번째 원칙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국제사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다.
정부 기업 국민의 일거수 일투족은 우리가 과연 협력할만한 대상인가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두번째 원칙은 국제화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함으로써 모든 구성원들이
국제사회에서 그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할 수 있도록 국제감각을
연마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도 남에게 줄 것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고 받을 것이 있어야 국제화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민족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잠들어 있는
우리의 창의성을 일깨워야 한다.
이제 비닐하우스를 나서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9일자).
이면우 < 서울대 교수 >
옛 속담에 "이불속에서 활개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마치 비닐하우스 안에서 세상 밖을 내다보며 좁은 소견으로 이것
저것을 추측하려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제회의에서 만난 홍콩은행장은 필자가 잘 아는 기업인을 가리켜 "한국인
치고는 도전적"이라고 하였다.
그의 은행을 찾는 한국기업인들은 대부분 위험부담이 작고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사업만을 찾는다고 하였다.
워싱턴에서 만난 경제학자는 그가 만났던 정부관리를 평하며 "한국인치고는
솔직한 편"이라고 하였다.
그는 비판을 싫어하는 관료들을 많이 만나보았을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온 연구소장은 그와 토론하였던 교수 이름을 대며 "한국인
치고는 토론에 적극적"이라고 하였다.
좀처럼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 한국 대표들을 많이 보았나 보다.
"한국인치고는"이란 무엇인가.
이들이 보는 한국인 초상은 어떠한가.
미국친구의 부탁으로 한국을 방문한 기업인을 안내한 적이 있었다.
그의 눈에는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차량이 많이 띄었나 보다.
그는 한국같이 잘사는 나라가 왜 사회의 기본계약을 지키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위대한 한국인이라는 장식을 붙인 차가 지나가자 그는 그 뜻을 물었다.
그 뜻을 설명한 직후 차안의 젊은이는 침을 뱉으며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가 본 위대한 한국인은 공중위생도덕이 부족하였다.
시내 호텔앞에서 택시 바가지요금에 항의하던 한 외국인은 필자에게 "이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한국은 크게 발전하지 못할 것"
이란 말을 운전기사에게 통역해 달라고 하였다.
국제회의에서 자주 만났던 미국인 교수는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웠었다고 하였다.
"나"의 생각은 이야기하지 않으며 "국가와 경제발전"에 관한 발언이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더라고 하였다.
한국인같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고 하였다.
유럽에서 온 대학생 연수단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인상이 어떠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하였다.
그간 한국인을 많이 만나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자꾸만 반복해 묻길래 한국인의 첫인상은 매우
좋으며 모두 친절하다고 칭찬하였더니 그제서야 흡족해 하더라는 것이다.
한강에 있는 다리가 무너지던 해에 서울에서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었다.
필자는 미국인 노교수부부와 다리를 건널 기회가 많았다.
잠수교를 지날 때 뒷자석에 앉았던 노교수가 부인을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하였다.
"여보, 이 다리는 안전한 다리라고 들었소"
한국을 소개하는 관광책자를 독파하고 온 친구가 있었다.
그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긴장하였다.
물을 마실 때에도 이 물은 괜찮은 물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외국을 여행할 때 여러가지 유의사항을 듣는다.
터널은 공기가 나쁘고 최근에 다리가 무너진 곳이 있으며 식수오염도가
높은 나라라고 하면 여러분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미국행 비행기 속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의류수입업자와 장시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사업가로서 한국인은 대하기가 매우 벅찬 상대라고 하였다.
그와 오랜 관계를 가진 한 의류회사가 약속한 날짜에 물건을 납품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주문량이 밀려 그보다 나중에 계약한 회사에 먼저
납품하였다는 것이다.
항의하였더니 오랜 친분관계가 있는 사이여서 이해해줄 줄 알았다고
하더란다.
그는 물었다.
"한국인들은 친분이 두터우면 사업상의 계약을 소홀히 생각하는가"
우리 기업이 30년동안 단골이 없는 이유를 짐작할 듯 하였다.
해외에서 핵심부품을 수입하여 제품을 만들어 팔던 회사는 로열티를 적게
지불하고자 제품 매출액을 낮게 책정하였다.
상대 기업에서는 핵심부품을 사간 숫자가 있으니 매출액이 이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매출액이 정말로 적었다면 재고로 남아있는 핵심부품 수를 세어보자고
하였다.
그 회사는 실제 매출액에 대한 로열티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문제를 해결하였다.
유럽 전자전시회에서 만난 외국회사의 임원은 한국기업에서 파견된
관람자가 전시장에 들어오면 긴장한다고 하였다.
전시된 물건을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험하게 다루기 일쑤이며 장식품을
떼어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였다.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인의 초상은 어떠한가.
우리 기업인들의 국제화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필자가 들었던 단편적인 일화를 몇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무역업을 하는 미국회사 회장은 우리 기업인들의 성격이 조급하다고
하였다.
상대방을 알고 싶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건네보았으나 대화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 계약체결로 이야기를 몰아가더라고 하였다.
믿을만한가, 같이 사업을 할 만한 사람인가가 궁금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계약에만 온 신경이 쏠려있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벤처회사 사장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한국에서 방문한 사장을 일요일에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장은 자신외에도 여러명의 임원을 대동하고 정장차림으로 방문하였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그는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의 부인이 손님들이 앉을 의자를 나르는데 모두 서서 보고만 있었다고
하였다.
미국 관습으로는 도왔어야 했다.
사장을 중심으로 한쪽으로만 앉으려고 하였고 앉는 순서도 직급을
따르더라고 하였다.
경직된 사람들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사장이 이야기하는 것을 임원들이 받아 적더라고 하였다.
백번도 더 들었을 이야기인데 왜 적는가.
이야기를 받아 적으니 조심스러워 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더라고
하였다.
미국경찰은 현장에서 잡힌 범인에게도 인권보호 차원에서 말조심을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경고하지 않는가!
디트로이트에 있는 회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회장과 함께 7명의 임원이 회사를 방문하였는데 회장 이외에는 별로 말이
없더라고 하였다.
꽤 궁금했을 것이다.
경호원들인가.
그 회장은 자랑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남의 기술과 설비로 값싼 제품을 많이 판 것이 무슨 큰 자랑인가.
그 회장은 합작의 조건으로 경영권을 요구하였다.
사업계획을 물었더니 "기어코 성공시키고야 말겠다"고만 하더란다.
의지는 강한데 비전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정중히 합작추진을 거절하였다.
해외지사는 국제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해외지사는 어떻게 운영하여야 할 것인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등반가는 그의 등반 기술이 제아무리 좋더라도
네팔인 셰르파의 안내와 조언을 따른다.
아프리카를 방문하는 사냥인은 그의 사냥기술이 제아무리 좋더라도 사파리
안내인의 도움을 받는다.
이것이 국제화의 지혜이다.
아무리 경영능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해당지역 전문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우리 관습만을 주장하다면 그 기업의 국제화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회장과의 대화를 기록하려면 임원들, 일요일에 정장차림으로 가정집을
방문한 사장단은 현지인 전문가로부터 미국의 생활관습에 대해 조언을
받았더라면 훨씬 더 좋은 상담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의 국제화 수준이 마치 화전민 마을의 비닐하우스
에서나 통용되는 관습이 바깥 세상에서도 통할 줄 알았다가 망신을 당한
사연들이다.
한때 해외관광이 부쩍 늘었었다.
관광객들은 김포공항에서 모여 좌석을 나란히 배정받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마중나온 한국인 안내인을 만난다.
교포가 운영하는 호텔에 투숙하고,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교포
가게에서 선물을 산다.
이들의 기념사진을 보면 온통 한국관광객뿐이다.
이런 관광을 수십번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런 관광을 비닐튜브 관광이라고 부른다.
비닐튜브속을 지나며 바깥 세상을 대충 훑어보고 오기 때문이다.
비닐튜브출장이라는 것도 있다.
해외교포들이 모여사는 곳의 식품점에 가보면 주변가게보다 조금씩 비싸다.
그래서 다른 교포에게 물어 보았다.
억울하지 않으냐.
그는 커튼 가게를 하는 사람인데 피장파장이라고 하였다.
그 식품가게 주인이 와 커튼을 맞추면 그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하였다.
이민을 갈 때 비닐하우스도 가져간 것이다.
국제화는 왜 필요한가.
혼자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교류가 필요하며, 교류가 성립되려면 서로 주고 받는 것, 사고 파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인기있는 교류 대상인가.
해외언론이 보는 한국은 어떠한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관료는 정직하지 못하며, 통계보고는 믿음직스럽지
않다.
각료들은 너무 자주 바뀌어 이름조차 외우기 힘들다.
기업 경영은 투명하지 못하고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으며 계약이행
여부도 확실치 않다.
내수가격보다 싼 수출품은 덤핑 의혹을 받는다.
남의 것은 사지 않고 자기 것만 팔고자 한다.
현자의 행진을 비판하면 외세의 간섭이라고 흥분하고 화전민 마을을
지적하면 국산품 애용운동이 벌어진다.
외국회사와 협의는 많아도 결정되는 사안은 드물다.
꽃마을이 연장된 것이다.
외국인에 비친 우리는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다.
만나서 부담스러운 사람은 어떻게 대하는가.
안만날 것이다.
국제화에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국제화의 대책수립은 지엽적인 영어교육으로 대체되었다.
국제화란 남의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주는 것은 없으면서 받으려고만 하는 억지는 통용될 수 없다.
과거에는 경제력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돈이 없다는 것을 전세계가 알고 있지 않는가.
만일 줄 것이 없이 받고자만 한다면 이는 국제협력이 아니라 국제구걸이며,
구걸은 모욕과 멸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산업구조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패러다임도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비닐하우스의 모판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올가을 수확을 꿈꾸며 국제화의 모내기에 착수하는 것이다.
모내기 운동은 다음의 3대 원칙하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첫번째 원칙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국제사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다.
정부 기업 국민의 일거수 일투족은 우리가 과연 협력할만한 대상인가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두번째 원칙은 국제화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함으로써 모든 구성원들이
국제사회에서 그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할 수 있도록 국제감각을
연마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도 남에게 줄 것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고 받을 것이 있어야 국제화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민족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잠들어 있는
우리의 창의성을 일깨워야 한다.
이제 비닐하우스를 나서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