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야 되는 겁니까"

현대그룹의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던 19일 오후 2시.

석간신문을 보고 있던 모 대기업의 중역은 기자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와 총수들간의 만남이후 각 그룹들은 구조조정안의
발표수위를 놓고 머리를 짜냈다.

그러나 정작 내놓을 만한 카드가 별로 없다는게 이들의 고민이다.

"지금은 정치권과 언론이 답안지를 미리 만들어 놓고 여기에 따라올 것이냐
말 것이냐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상황"이라는 분위기마저 있다.

기업들로선 또다른 골칫거리가 있다.

바로 그룹 임직원들의 사기저하다.

모 전자회사 부장은 최근의 사무실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지금 직원들의 생산성은 완전히 제로다. 상사가 일을 시켜도 눈치만 본다.
사실 직원들만 나무랄 일도 못된다. 어느 계열사는 통폐합되고 어느
계열사는 팔린다는데 누군들 일손이 잡히겠는가"

그룹에 따라선 구조조정의 "폭탄선언"까지 거론되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과연 어느 그룹이 기대(?)만큼의 내용있는 구조조정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치권은 폭탄선언을 요구하고, 그에 비례해 직원들은 동요하고..

그러다보니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아예 LG그룹은 서둘러 구조조정안을
발표해 버렸다.

모든 동전엔 양면이 있다.

구조조정문제도 마찬가지다.

김영삼 정부의 실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론 문제를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편적인 처방만을 내왔던 것에 있다.

사정조치가 그랬고, 실명제가 그랬으며 외환위기에 대처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원칙은 옳지만 각론으로 들어가선 모두 엉망이 돼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이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 큰 것 한건이 나와야만 "일을 제대로 했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탕주의"의 거품부터 빼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또다시 앞서 나가고 있다"는 재계의 냉소적인 반응이
예사롭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이의철 < 산업1부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