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시장경제.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내건 경제이념이다.

우리에게 시장경제라는 단어는 더이상 낯선 용어가 아니다.

시장경제는 이제 우리를 IMF로부터 졸업시켜 줄수 있는 마법의 주문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 앞에 붙어 있는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는 우리를 잠시
머뭇거리게 한다.

전통적으로 시장경제라는 단어앞에는 "자유"라는 수식어가 고정적으로
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자유시장(free market 경제"라는 단어는 흔히 들어보았지만 "민주시장
(democratic market)경제"라는 표현은 어딘가 모르게 생경하다는 얘기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 폰 미제스, 하이에크 등 오스트리아
학파가 설명하는 자유개념, 그리고 밀튼 프리드먼이 주장하는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 등에서와 같이 "자유로운 선택보장"은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이념이다.

경제이론에 관한한 웬만한 경제학자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당선자가 이를 모를리 없을 테고, 따라서 김당선자가 시장
경제라는 단어 앞에 붙어있던 "자유"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민주적"이라는 문패를 달아 놓은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시중 재사들의 해석이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시장경제 앞에 "사회주의적"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여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조어를 만들어낸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나 해야
할까.

주로 정치적 이념으로 쓰이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개념인 시장경제가
동시에 추구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실제로 김당선자는 대선기간중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병행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말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민주와 시장경제라는 단어를 한데
묶어놓고 보니까 본의 아니게 민주라는 단어가 시장경제가 추구하는
본질을 제약하는 족쇄로 비쳐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리적 판단을 해보면 분명히 서쪽으로 가는 것이 유리한 줄 알면서도,
"민주"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살피다 보니 동쪽으로 가야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게 된 것이다.

김당선자가 세세히 설명을 해주지 않는 한 "민주적"시장경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형편을 감안해 볼 때 김당선자가 붙여놓은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는 "고통분담"이라는 우리사회의 화두를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최대 난제인 정리해고문제를 떠올리면 그런 추측은 더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중 누구도 동료를 직장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외국인들은 당장 그렇게 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투자에 따른 메리트를 찾을수 없다는게 이들의
입장이다.

뭔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한 벼랑 끝에 선 우리를 붙잡아 줄리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김당선자 말대로 모라토리엄에 처하게 되면 현금이 없는 한 우리는 식량과
석유를 살수 없다.

현금이 없어 당하는 것이 모라토리엄이다.

그러니 현금이 있을리 없다.

꼼짝없이 춥고 배고플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직접투자 등 "장기체류형" 외국자본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당선자 말대로 외국돈이 국내에 들어와 있으면 그것은 우리 돈이지
남의 돈이 아니다.

일부가 빠져 나가더라도 또 다른 자금이 이를 대신 메워주면 마르지 않는
저수지 물처럼 그 수준이 그대로 유지될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달러를 끌어 들이려면 이들에게 "한국에 투자하면 돈이
남는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외국인들은 그 필요조건의 하나로 정리해고를 꼽고 있는 것이다.

이제 노사정위원회는 정리해고가 제도적으로 실시될수 있는 쪽으로
결론을 내줘야 한다.

정리해고는 99년 3월이면 자동적으로 실시하게 돼 있는 제도다.

다만 시기를 1년1개월 앞당기자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에 의해서도 4개항의 이른바 "성실의무조항"만 충족되면
이미 정리해고가 가능한 실정이다.

실질적으로도 정리해고 선풍이 모든 직장을 휩쓸고 있다.

"모두의 직장을 잃느니 일부라도 살리자"는 취지에서 임직원 전원이
자발적으로 사표를 낸 동서증권의 사례가 좋은 예다.

근로자들의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의지의 일환으로
김당선자는 청와대를 축소했고 상호지급보증해소, 결합재무제표작성
의무화 등의 실시도 약속하고 있다.

근로자들을 외롭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미 현실적으로 기정사실화된 정리해고를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외환위기에서 신속히 빠져나와 모두가 고용창출에 동참할 것이냐, 아니면
명분싸움을 계속하다 공멸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우리는 서있다.

"회의 많은 회사치고 잘되는 회사 못봤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마찬가지로 "위원회 많은 나라치고 잘되는 나라 못봤다"는 뜻에서
노사정위원회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평행선을 그어온 양자의 견해는 이미 김영삼정부가 설치운영한
노사개혁위원회에서 수없이 나온 얘기다.

사실상 더 이상의 토론은 무의미하다.

이제 결론을 내줄 때다.

그렇게 해서 시장경제라는 단어앞에 임시로 달아놓은 "민주"라는
수식어를 떼어 내고 원래 달려있던 "자유"라는 문패를 내걸고 진정한
의미의 "시장경제"를 추구할수 있게 하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