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하이터치 공동기획-

이면우 <서울대 교수>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새로 부상하는 선진국 벤처산업의 동향을 배우고자
하였다.

예전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91년에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를
방문하면서 불현듯 우리도 벤처산업을 육성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이 든 것은 벤처산업의 수많은 성공담에 감동을 받았기보다는
필자가 소속한 대학 부근의 고시촌이 생각났었기 때문이다.

스탠퍼드(Stanford)대학이 있는 실리콘 밸리는 폭 15km, 길이 50km의
협소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수많은 첨단 벤처기업들이 빽빽이 입주해 있다.

이들은 미래를 연구하며 정보사회의 신천지를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성공하면 정보혁명이 가속화되고 산업구조가 변혁된다.

서울대가 있는 신림동은 고시촌이다.

고시촌에 입주한 젊은이들은 과거를 연구한다.

육법전서를 외우고 판례를 암송한다.

이들이 성공하면 치안이 유지되고 송사가 해결된다.

실리콘 밸리 젊은이들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여러 사람들과 만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온갖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노력에 몰두한다.

신림동 젊은이들은 사람 만나는 것을 적극 자제하며 독방에서 홀로
공부한다.

개인의 실력을 연마하며 고유정보를 비망록에 기록한다.

스탠퍼드 대학 석.박사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졸업후에도 지도교수와 긴밀한
협력연구를 수행한다.

신림동에서는 수업을 소홀히 하며 고시촌에 상주하고 교수와 단절된
생활을 계속한다.

실리콘 밸리의 식당과 카페에는 벤처사업가와 벤처투자가(Venture
Capilalist)들이 모여 온갖 정보를 교환한다.

신림동의 순대집과 노래방에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고시생이 모여든다.

실리콘 밸리의 젊은이들은 가슴이 울렁거린다.

추진하고 있는 일이 성공하면 미래사회가 앞당겨 전개되기 때문이다.

고시촌의 젊은이들은 가슴이 답답하다.

10번만에 합격한 선배도 있고 단번에 합격한 후배도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는 미래를 꿈꾸며 창조하는 사회이고 신림동 고시촌은 과거를
들추어가며 현재를 지키려는 사회이다.

실리콘 밸리는 금광을 찾아 서부로 모여들던 개척자의 후예이고 신림동
고시촌은 고사와 법도를 중히 여기던 조선조 선비의 후예이다.

이것이 고시촌을 연상하며 벤처산업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 배경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젊은이들도 미래를 향한 벤처산업에 투신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벤처사업이란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가 있으나 높은 위험부담 때문에 기존의
기업이 선뜻 착수하기 어려운 사업을 말한다.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 성공을 자신하는 경우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직접 추진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국내 벤처열풍의 몇가지 걱정스러운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실리콘 밸리의 벤처사업가는 이론적 배경이 탄탄하다.

이들이 내는 아이디어는 석.박사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졸업후에도 지도교수와 긴밀히 연락한다.

우리 대학에서 벤처 설명회가 열리면 7백~8백여명의 참관자가 강당을
메운다.

이들 대부분은 대학 재학생이며 신입생들도 많다.

설명회를 듣고 이론적 기반 없이 곧 벤처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찌될 것인가.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한 벤처사업가들은 대부분 차고나 골방이나 창고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우리 주변에는 벤처사업가들에게 대형 단지내에 연구실을 제공하겠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연구실을 제공한다고 벤처산업이 육성되는 것은 아니다.

야심적인 계획을 세우고 벤처산업을 육성하려던 동남아의 한 정부도
벤처단지를 만들어 놓았으나 실패하였다.

입주자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혼자 힘으로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저금통을 뜯고 애인의 도움을 받으며 부모와 친척들의 주머니돈을
지원받는다.

꼭 성공할 것같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 정부는 아이디어가 미처 완성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지원해
주겠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없는 사람들도 덩달아 지원을 요청할 것이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벤처 아이디어를 투자가에게만 보여준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위원회에서 심사한다.

정말로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여러분은 공모에 응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실리콘 밸리의 유명한 투자가들은 모든 사업 계획서를 5쪽이내로
작성하라고 요청한다.

바쁘기 때문이다.

투자액은 2백억~3백억원 규모를 선호한다.

연간 매출액은 1조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투자여부 결정은 15분이내에 해야 한다.

우리는 모험정신이 부족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모험사업을
심사한다.

벤처사업 축에 끼려면 미래형 사업이어야 하고 세계시장을 겨냥해야 한다.

부품의 국산화, 소프트웨어의 한글화 등은 내수시장을 겨냥한 중소기업
사업영역이다.

벤처열풍이 일자 대기업도 사내 벤처클럽을 육성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의 기준으로는 위험부담 때문에 채택하기 힘든 사업을 벤처라
하지 않았는가.

큰 성공을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과열되고 있는 벤처열풍을 보며 걱정되는 일이 많다.

벤처마저도 겉으로 나타난 실리콘 밸리를 모방하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는 소식도 걱정스럽다.

유망하다니까 모인것 아닌가.

자금을 지원한다니까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닌가.

모두 다 모이니 나도 한번 가보자는 사람은 없는가.

정부가 벤처자금을 지원하겠다는데 이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정부는 해외 성공사례를 다시 한번 조사해 보기 바란다.

실리콘 밸리는 정부가 지원을 중단한 이후에 성공하였다.

정부가 지원하여 성공한 벤처산업이 있는가.

젊은이들을 상대로 제2의 난지도연구소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필자는 97년 8월부터 대학원 학생들에게 벤처사업을 추진해 보자고
제안하였다.

대학원생들에게 말하기를 "학기말에 학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사업이
성공하면 배당금도 받을 것이다"고 하였다.

대학원생들이 한번 해보자고 하였다.

필자가 대학교수가 된 이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본 적이
없다.

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벤처 아이디어가 나왔다.

학기말인 12월말에는 시제품도 완성되었다.

이 벤처제품은 상표 인지도가 높은 8개의 세계일류기업과 사업화가
논의되고 있다.

그들이 추정한 연간 매출액은 1조원이 넘는다.

이 사업이 성공한다면 대학원생의 숙제를 채점하였던 박사과정 학생은
매년 수억원의 배당금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낸 아이디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숙제를 뒤늦게 제출하곤 하던 석사과정 신입생은 매년 1억원이 넘는
배당금을 받게 될것이다.

회로설계도 작성을 돕고 부품을 구하러 청계천을 뒤지던 대학 2학년생과
디자인을 담당한 미대생들도 수천만원의 배당금을 기대하고 있다.

학생들과 개발을 추진하면서 벤처의 성공요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기업의 친구, 해외 유학생, 실리콘 밸리의 벤처투자가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점은 벤처사업은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벤처 아이디어는 구슬에 해당된다.

그러나 구슬 자체가 큰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고 여러 구슬이 조화를
이루며 연결되어 목걸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큰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벤처는 4백m계주같다는 생각도 든다.

4백m계주의 주자는 그다음 주자에게 재빨리 바통을 넘겨주어야 한다.

벤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회로설계 전문가에게, 판매기획 전문가에게
그 개념을 이전해야 한다.

기술정보 수집과 해외투자동향도 전문가와 협력하여야 한다.

산업디자이너와 광고기획자의 조언도 필요하다.

성공 후 보상분배를 이행하기 위하여 변호사도 참여해야 한다.

4백m계주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필자는 한국형 벤처모델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의 첫 단계로서 전국 대학, 전문대학의 모든 교수와 학생들은 벤처
네트워크(Frontier Network)를 만들어야 한다.

이 네트워크는 국내외 대학은 물론이거니와 해외 벤처투자가들과도
교류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학네트워크는 중소기업모임(New Paradigm Club)과도 협력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공정설비의 활용, 부품수배, 시제품제작과정에서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도 중소기업인들에게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네트워크는 미래사업분야를 연구하는 가상연구소(Virtual
Institute)와 교류하여야 한다.

가상연구소는 대학생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분야를
알려줄 것이다.

고목나무의 소생방안인 두 항아리 시스템(Two Pot System)과도 관련을
맺어야 한다.

작은 항아리(Pot 2)는 아이디어의 구현과정에서 새로운 도전대상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의 투자가들도 이러한 구상에 적극 동조하고 있다.

취지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들의 사업도 번창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장에 모였던 전국의 선비들은 예상문제와 답안내용을 토론하느라
시끌벅적 하였다.

온갖 기발한 착상과 재치있는 의견이 교환되었던 난장터인 것이다.

한국형 벤처모델은 난장터의 자유분방한 토론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난장터를 구상하는 우리의 3대 원칙은 무엇인가.

첫째 실리콘 밸리를 넘어 그 이후의 시대를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실리콘 밸리도 멀지않아 큰 장벽에 부딪칠 것이다.

실리콘 밸리는 정보인프라의 구축과 함께 성장하였다.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실리콘 밸리도 사양으로 접어들 것이다.

둘째 난장터는 실리콘 밸리 이후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중소기업모임, 두 항아리 시스템, 가상연구소, 세계로 뻗어갈
전국대학 네트워크가 입주할 것이다.

난장터의 발전목표는 무엇인가.

셋째 야성적인 민족성과 민족고유의 창의성이 난장터에서 어우러지면서
동북아시아 경제권을 새로 구축하여야 한다.

이제 난장터의 중앙에 서서 국가의 새로운 비전을 생각하여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