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웅 < 산업1부장 >

새롭다는건 늘 아름답다.

출발은 또 가슴설레는 기대를 동반한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희망찬 설계를 그려보고 새학년에 오르는 학생들이
정진을 위한 각오를 다지는 것도 바로 새로움의 미학이다.

따지고보면 정치도 마찬가지다.

새정권의 출범은 그 새로움 만으로도 신선하다.

국민들은 지지와 신뢰로 애정을 보이고 새정부는 의욕으로 이에 보답한다.

사실 지금 우리가 새 정부에 거는 기대는 각별하다.

IMF시대, 고단해진 삶의 무게를 새로운 해법으로 가볍게 해줄 수 있으리
라는 바램에서만은 아니다.

역경을 외길로 헤쳐온 새 대통령당선자가 보여주고 있는 원숙함의 부피가
벌써부터 생각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환호하는 군중속에선 작지만 중요한 지적들이 묻혀버리기도
쉽다.

재벌개혁이란 이름 아래 진행되고 있는 당선자 진영의 대기업정책도 바로
그런 류의 하나다.

다시말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재벌정책이 행여나 지나치게 여론야합적으로
흘러 길게 볼 때 우리경제 회생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의 시각도 없지않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대기업그룹들의 유형이나 경영패턴은 사실 독특하다.

그리고 이는 우리기업의 생성과정 성장과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불과 몇십년만에 무에서 이루어낸 한국경제의 성장신화와 국민 삶의 질
향상은 결코 상식적인 패턴, 일상적인 노력, 그리고 보편적인 경영으로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한국적 기업경영 방식이 극찬 받기도 했다.

서방의 언론들이 "한국의 정치는 3류이지만 경제는 일류"라는 평가를
내리는가하면 "우리경제와 기업의 모델을 배우겠다"는 후발국 테크노크라트
들의 발길이 끊이지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던게 지금 사정이 확 달라져있다.

대기업은 차입경영과 무리한 투자로 상징되고 기업인은 탐욕의 화신처럼
매도되고 있다.

그런만큼 지금 정치권이 고통분담을 이유로 기업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걱정되는 대목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룹총수의 사재출연이 재벌개혁의 궁극적 목표이자 엑기스쯤으로 생각하는
발상은 그야말로 자유시장국가의 넌센서다.

소위 빅딜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에서 야기될 더 많은 실업사태와 혼란을 생각할 때 결코 재촉할
성질은 아니다.

진짜 알짜기업을 외국인들에게 내놓으라는 촉구는 우리기업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 같아 더구나 답답하다.

여기서 보다 더 우려되는건 지금 기업에 가해지는 무분별한 여로공세다.

일부언론까지 가세한 기업길들이기 공세가 국민들의 기업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조장하는데 대단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는 물론 과거 정권교체기에도 흔히 있어왔다.

5.16직후, 국보위시절, 그리고 바로 5년전에도 그랬다.

실세들의 힘과 선명성을 과시하고 서민들의 카다르시스를 해소하는데
이처럼 효과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기업이 무조건 선하다는건 아니다.

뼈를 깍는 자기반성이 필요한 대목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 반성이 합리적인 성찰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라 여론 조성을 통해
강요되고 매도된다는게 문제다.

국민이 자기나라 기업을 사랑하지 않게 만든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지금 이 땅에서 국난극복을 위해 더 빛나고 장려되어야 할 기업가정신이
한없이 상처받고 매도되는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말없는 기업, 그리고 기업인들의 건투를 빈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