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54) 낭간 유성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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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원은 세종 26년(1444) 갑자 5월 13일 근정전에서 치러진 친시에서
최종 합격하여 문과에 급제하는데 5월 16일에 합격방이 나붙는다.
가장 연소한 축에 들었던 유성원의 총명을 높이 산 세종은 유성원을 집현전
저작랑(정8품)으로 발탁해서 집현전 학사로 키워갈 생각을 한다.
이에 1년여동안 사가독서를 시킨 다음 유성원이 20세가 되는 해인 세종
27년(1445) 10월 27일에는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과 더불어 방서를 수집
분류하여 책으로 꾸미게 한다.
한편으로는 이 해에 집현전 직제학 김문과 신석조 등으로 하여금 의관
전순의 최윤 등과 함께 의서를 모아 분문유취하는데, 이 두 종류의 책을
합쳐서 "의방유취" 3백65권을 이후 3년간에 걸쳐 편찬해 내게 한다.
안평대군 이용과 도승지 이사철 등이 감수하여 이 일을 이루어 내는 바 이
일을 진행해 가면서 유성원은 안평대군의 눈에 띄었던 듯하다.
안평대군은 본디 총명호학하는 젊은 선비를 몹시 사랑하였었는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섯째 아우인 금성대군 유(1426~57)와 동갑인 이 천재
청년학사 유성원을 안평대군이 어찌 권우하지 않을리 있었겠는가.
그래서 자신의 별호인 낭간을 선뜻 그 별호로 나누어 주었던 듯하다.
그래서 다음 해인 세종 28년(1446)에는 집현전 박사(정7품)로 승진하는 듯
10월 10일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과 응교 최항, 교리 박팽년, 수찬 성삼문,
부수찬 이개 등과 함께 박사 유성원도 대간의 처벌을 거두라는 상소를 연명
으로 올리고 있다.
세종 29년(1447) 정묘는 유성원이 22세 되는 해인데 2월 16일 사왕(뒤를
잇는 왕)이 즉위하는 의식을 찬술하면서 관복 길흉의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이를 의논하는 자리에서도 유성원은 박사의 자격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해 8월 27일에 치러진 문과 중시에서 성삼문이 장원을 하고
김담 이개 신숙주 박팽년 최항 이석형 등이 급제하는 중에 유성원도 집현전
박사로 을과 2등 7인중 6등으로 급제한다.
그 손위 처남인 송처관은 승문원 교리로 5등으로 급제하고 문과 동방
급제자인 이극감은 7등으로 급제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선배 집현전 학사들 틈에 이극감과 함께
최연소 급제자로 끼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그 천재성을 높이 사서 유성원을 수찬(정6품)으로 바로 승륙
(6품으로 오르는 것이 하위직을 면하는 한 고비가 되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시키니, 세종 30년(1448) 5월 9일에 종실 이담의 후처 이씨 상사에 전처
백씨 소생의 복상 여부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유성원은 수찬의 자격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23세밖에 안된 청년이 벌써 수찬이 된 것은 지나치게 빠른 고속 승진이었다.
그 보다 거의 8,9년 선배이던 성삼문이나 이개가 세종 29년(1447)에
중시를 볼때 각기 30세와 31세였는데 그 때 아직도 수찬의 자격으로 중시에
급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세종은 왕비 소헌왕후 청송심씨가 세종 28년(1446) 3월 24일 52세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불교에 귀의하기 시작하여 그 3년상이
끝나는 30년(1448) 3월 24일 전후해서 부터는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왕세자에게 국정을 위임하고 오직 불교신앙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하려는
심사에서 였다.
그래서 3월 5일에는 동궁의 의장을 새로 제정하여 호군(정4품) 안견으로
하여금 이를 그림으로 그려 책으로 만들게 하고, 3월 21일에는 장차 원손을
왕세손으로 책봉하기 위해 왕세손 관속인 강서원을 설립하여 종4품의
좌우익선과 종6품의 좌우찬독을 배치하되 이는 모두 집현전 학사들이 겸직
하도록 한다.
마침내 소헌왕후의 대상이 끝나자 4월 3일 원손 홍위를 왕세손으로 책봉
하니 이 분이 바로 뒷날 단종이 되는 노산대군이었다.
그리고 나서 7월 7일 세종은 경복궁 궁장안 동쪽 문소전 서북쪽 공터에
내불당을 짓기 시작한다.
삼국 이래로 왕궁 안에 불당을 짓던 근 천년의 전통을 태종 12년(1412)에
겨우 혁파하였었는데 겨우 36년이 지나서 다시 이를 짓는다 하니 유신들의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굳건한 의지로 이를 물리치고 그 건립 불사를 강행하여
12월 5일 황금불상을 봉안하는 경찬법회를 5일동안 개최하는 것으로 이를
마무리짓는다.
이때 수양대군은 경찬회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고 경찬회 계문을 짓고
경찬회에 참여한 인명을 열서하여 합장한 "내불당 영건 경찬회도"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한다.
그리고 12월 14일에는 소헌왕후가 40세에 늦둥이로 낳은 막내대군인 영응
대군 염(1434~67)을 위해 안국방에 그 저택을 지을 택기를 마련하고 굉장한
규모의 별궁을 짓는다.
장차 자신의 노년을 이곳에서 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 31년(1449) 1월 27일부터 세종은 고질병인 안질과 각통이
더치고 심허증이 겹쳐서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6월 4일에는 왕세자로 하여금 군국 대사를 제외한 일체의 서무를
대리하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뜻밖에 명나라 영종이 북원의 후예인 달단을 정벌하러
산서성 대동으로 친정했다가 8월 15일에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9월 6일에
당도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즉각 계엄을 발하여 이들의 침입에 대비하는데 세종은
밤잠을 설치며 주야로 노심초사하다가 급기야 9월 24일 병환을 얻어 제
6대군인 금성대군의 저택으로 이어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무를 대리하던 왕세자마저 10월 25일에 등창이
나서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니 세종은 할 수 없이 11월 14일부터 정무를
친결하는 무리를 감행한다.
그러면서 안국방에 새로 지은 영응대군 저택이 거의 1년만에 완공되자
12월 19일에는 이 새집으로 세종이 이어하고 왕세자가 금성대군저로 이어
하는 무리를 다시 범한다.
그래서 잠시 회복세를 보이던 세종과 왕세자의 병환이 다시 더쳐 12월 22일
명나라 사신으로 한림원 시강 예겸이 온다는 통보를 받았을때 국왕부자는
이를 맞이할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위중하게 된다.
이에 12월 24일 9세밖에 안된 왕세손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것인가의
여부를 의논하게 되는데 왕세손 강서원의 좌익선 박팽년, 우익선 신숙주,
좌찬독 유성원, 우찬독 이극감은 왕세손으로 하여금 이를 접대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 보면 유성원은 겨우 24세밖에 안되었으면서 23세의 이극감과 함께
왕세손의 좌우찬독으로 왕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나이 어린 집현전 학사들이었기에 어린 왕세손과 허물없이 지내도록
하기 위해 이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였을 것이다.
이때 이 인연이 정인 군자인 박팽년과 유성원으로 하여금 장차 단종을
보호하다가 멸문의 화를 당하게 하고 무상 소인인 신숙주와 이극감을 배신과
반역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병환은 더욱 악화되어 세종 32년(1450) 1월 22일에는 동대문밖에
있는 효령대군 저택으로 이어하면서(당시에는 병환이 위중하면 피병을 위해
거처를 자주 옮기는 풍습이 있었다) 좌참찬 정분을 내불당으로 보내어
공작명왕재를 올리게 하고 도승지 이사철을 흥천사로 보내어 관음정근
법석을 설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을 경기도내 명산 대천과 신사와 절로 보내어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는 한편 부윤 박연과 응교 김예몽, 수찬 유성원을 불러 내약방에서
의학에 관한 서적을 7일간 상고하여 왕의 병환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법을
강구해 보게 하였다.
유성원 등이 "의방유취"를 편찬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세종의 병환이 조금 차도를 보이기는 하였지만 윤 정월 1일
명나라 사신인 한림 시강 예겸과 형과급사중 사마순이 서울에 들어올때
세종과 왕세자는 이들을 영접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수양대군이 국왕과 세자를 대신하여 이를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수양의 야심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박팽년 등의 주장대로 어리나마 10세의 왕세자로 하여금 이들을
영접하게 하였다면 수양이 감히 대권을 넘볼 생심도 내지 못하였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도 영명하였던 세종대왕도 수양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하였으니
자식을 믿는 부모의 애자지정이 총명을 흐려놓아 그리 된 것이었던가 보다.
이 한때의 실수가 장차 그렇게도 사랑하던 아드님들인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등을 비명횡사케 하고 끝내 대통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왕세손을 흉수의 손에 17세 어린 나이로 시해당하게 하며 재위 32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길러 놓았던 나라의 기둥 집현전 학사들을 일시에 도륙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윤 정월 5일에 세종의 병세는 조금 호전되는 듯 하였다.
그래서 좌참찬 정분을 내불당으로 보내고 도승지 이사철을 흥천사로 보내어
불공의 효험에 감사하는 보공재를 올리게 한다.
그 사이 명나라 정사와 부사인 예겸과 사마순은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과 시주로 사귀면서 양국간의 문화외교를 전개하는데, 윤 정월
11일에는 수양대군이 대행하는 온짐연의 연회석상에서 안평대군의 글씨를
청하여 수십 폭을 얻고는 송설옹(원나라 조맹의 별호)의 삼매를 얻었다고
극찬하며 각각 시를 지어 이에 감사하기도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3일자).
최종 합격하여 문과에 급제하는데 5월 16일에 합격방이 나붙는다.
가장 연소한 축에 들었던 유성원의 총명을 높이 산 세종은 유성원을 집현전
저작랑(정8품)으로 발탁해서 집현전 학사로 키워갈 생각을 한다.
이에 1년여동안 사가독서를 시킨 다음 유성원이 20세가 되는 해인 세종
27년(1445) 10월 27일에는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과 더불어 방서를 수집
분류하여 책으로 꾸미게 한다.
한편으로는 이 해에 집현전 직제학 김문과 신석조 등으로 하여금 의관
전순의 최윤 등과 함께 의서를 모아 분문유취하는데, 이 두 종류의 책을
합쳐서 "의방유취" 3백65권을 이후 3년간에 걸쳐 편찬해 내게 한다.
안평대군 이용과 도승지 이사철 등이 감수하여 이 일을 이루어 내는 바 이
일을 진행해 가면서 유성원은 안평대군의 눈에 띄었던 듯하다.
안평대군은 본디 총명호학하는 젊은 선비를 몹시 사랑하였었는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섯째 아우인 금성대군 유(1426~57)와 동갑인 이 천재
청년학사 유성원을 안평대군이 어찌 권우하지 않을리 있었겠는가.
그래서 자신의 별호인 낭간을 선뜻 그 별호로 나누어 주었던 듯하다.
그래서 다음 해인 세종 28년(1446)에는 집현전 박사(정7품)로 승진하는 듯
10월 10일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과 응교 최항, 교리 박팽년, 수찬 성삼문,
부수찬 이개 등과 함께 박사 유성원도 대간의 처벌을 거두라는 상소를 연명
으로 올리고 있다.
세종 29년(1447) 정묘는 유성원이 22세 되는 해인데 2월 16일 사왕(뒤를
잇는 왕)이 즉위하는 의식을 찬술하면서 관복 길흉의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이를 의논하는 자리에서도 유성원은 박사의 자격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해 8월 27일에 치러진 문과 중시에서 성삼문이 장원을 하고
김담 이개 신숙주 박팽년 최항 이석형 등이 급제하는 중에 유성원도 집현전
박사로 을과 2등 7인중 6등으로 급제한다.
그 손위 처남인 송처관은 승문원 교리로 5등으로 급제하고 문과 동방
급제자인 이극감은 7등으로 급제한다.
당대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선배 집현전 학사들 틈에 이극감과 함께
최연소 급제자로 끼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그 천재성을 높이 사서 유성원을 수찬(정6품)으로 바로 승륙
(6품으로 오르는 것이 하위직을 면하는 한 고비가 되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시키니, 세종 30년(1448) 5월 9일에 종실 이담의 후처 이씨 상사에 전처
백씨 소생의 복상 여부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유성원은 수찬의 자격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23세밖에 안된 청년이 벌써 수찬이 된 것은 지나치게 빠른 고속 승진이었다.
그 보다 거의 8,9년 선배이던 성삼문이나 이개가 세종 29년(1447)에
중시를 볼때 각기 30세와 31세였는데 그 때 아직도 수찬의 자격으로 중시에
급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세종은 왕비 소헌왕후 청송심씨가 세종 28년(1446) 3월 24일 52세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불교에 귀의하기 시작하여 그 3년상이
끝나는 30년(1448) 3월 24일 전후해서 부터는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왕세자에게 국정을 위임하고 오직 불교신앙에 전념하며 유유자적하려는
심사에서 였다.
그래서 3월 5일에는 동궁의 의장을 새로 제정하여 호군(정4품) 안견으로
하여금 이를 그림으로 그려 책으로 만들게 하고, 3월 21일에는 장차 원손을
왕세손으로 책봉하기 위해 왕세손 관속인 강서원을 설립하여 종4품의
좌우익선과 종6품의 좌우찬독을 배치하되 이는 모두 집현전 학사들이 겸직
하도록 한다.
마침내 소헌왕후의 대상이 끝나자 4월 3일 원손 홍위를 왕세손으로 책봉
하니 이 분이 바로 뒷날 단종이 되는 노산대군이었다.
그리고 나서 7월 7일 세종은 경복궁 궁장안 동쪽 문소전 서북쪽 공터에
내불당을 짓기 시작한다.
삼국 이래로 왕궁 안에 불당을 짓던 근 천년의 전통을 태종 12년(1412)에
겨우 혁파하였었는데 겨우 36년이 지나서 다시 이를 짓는다 하니 유신들의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굳건한 의지로 이를 물리치고 그 건립 불사를 강행하여
12월 5일 황금불상을 봉안하는 경찬법회를 5일동안 개최하는 것으로 이를
마무리짓는다.
이때 수양대군은 경찬회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고 경찬회 계문을 짓고
경찬회에 참여한 인명을 열서하여 합장한 "내불당 영건 경찬회도"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한다.
그리고 12월 14일에는 소헌왕후가 40세에 늦둥이로 낳은 막내대군인 영응
대군 염(1434~67)을 위해 안국방에 그 저택을 지을 택기를 마련하고 굉장한
규모의 별궁을 짓는다.
장차 자신의 노년을 이곳에서 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 31년(1449) 1월 27일부터 세종은 고질병인 안질과 각통이
더치고 심허증이 겹쳐서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6월 4일에는 왕세자로 하여금 군국 대사를 제외한 일체의 서무를
대리하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뜻밖에 명나라 영종이 북원의 후예인 달단을 정벌하러
산서성 대동으로 친정했다가 8월 15일에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9월 6일에
당도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즉각 계엄을 발하여 이들의 침입에 대비하는데 세종은
밤잠을 설치며 주야로 노심초사하다가 급기야 9월 24일 병환을 얻어 제
6대군인 금성대군의 저택으로 이어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무를 대리하던 왕세자마저 10월 25일에 등창이
나서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니 세종은 할 수 없이 11월 14일부터 정무를
친결하는 무리를 감행한다.
그러면서 안국방에 새로 지은 영응대군 저택이 거의 1년만에 완공되자
12월 19일에는 이 새집으로 세종이 이어하고 왕세자가 금성대군저로 이어
하는 무리를 다시 범한다.
그래서 잠시 회복세를 보이던 세종과 왕세자의 병환이 다시 더쳐 12월 22일
명나라 사신으로 한림원 시강 예겸이 온다는 통보를 받았을때 국왕부자는
이를 맞이할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위중하게 된다.
이에 12월 24일 9세밖에 안된 왕세손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것인가의
여부를 의논하게 되는데 왕세손 강서원의 좌익선 박팽년, 우익선 신숙주,
좌찬독 유성원, 우찬독 이극감은 왕세손으로 하여금 이를 접대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 보면 유성원은 겨우 24세밖에 안되었으면서 23세의 이극감과 함께
왕세손의 좌우찬독으로 왕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나이 어린 집현전 학사들이었기에 어린 왕세손과 허물없이 지내도록
하기 위해 이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였을 것이다.
이때 이 인연이 정인 군자인 박팽년과 유성원으로 하여금 장차 단종을
보호하다가 멸문의 화를 당하게 하고 무상 소인인 신숙주와 이극감을 배신과
반역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병환은 더욱 악화되어 세종 32년(1450) 1월 22일에는 동대문밖에
있는 효령대군 저택으로 이어하면서(당시에는 병환이 위중하면 피병을 위해
거처를 자주 옮기는 풍습이 있었다) 좌참찬 정분을 내불당으로 보내어
공작명왕재를 올리게 하고 도승지 이사철을 흥천사로 보내어 관음정근
법석을 설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을 경기도내 명산 대천과 신사와 절로 보내어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는 한편 부윤 박연과 응교 김예몽, 수찬 유성원을 불러 내약방에서
의학에 관한 서적을 7일간 상고하여 왕의 병환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법을
강구해 보게 하였다.
유성원 등이 "의방유취"를 편찬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세종의 병환이 조금 차도를 보이기는 하였지만 윤 정월 1일
명나라 사신인 한림 시강 예겸과 형과급사중 사마순이 서울에 들어올때
세종과 왕세자는 이들을 영접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수양대군이 국왕과 세자를 대신하여 이를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수양의 야심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박팽년 등의 주장대로 어리나마 10세의 왕세자로 하여금 이들을
영접하게 하였다면 수양이 감히 대권을 넘볼 생심도 내지 못하였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도 영명하였던 세종대왕도 수양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하였으니
자식을 믿는 부모의 애자지정이 총명을 흐려놓아 그리 된 것이었던가 보다.
이 한때의 실수가 장차 그렇게도 사랑하던 아드님들인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등을 비명횡사케 하고 끝내 대통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왕세손을 흉수의 손에 17세 어린 나이로 시해당하게 하며 재위 32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길러 놓았던 나라의 기둥 집현전 학사들을 일시에 도륙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윤 정월 5일에 세종의 병세는 조금 호전되는 듯 하였다.
그래서 좌참찬 정분을 내불당으로 보내고 도승지 이사철을 흥천사로 보내어
불공의 효험에 감사하는 보공재를 올리게 한다.
그 사이 명나라 정사와 부사인 예겸과 사마순은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과 시주로 사귀면서 양국간의 문화외교를 전개하는데, 윤 정월
11일에는 수양대군이 대행하는 온짐연의 연회석상에서 안평대군의 글씨를
청하여 수십 폭을 얻고는 송설옹(원나라 조맹의 별호)의 삼매를 얻었다고
극찬하며 각각 시를 지어 이에 감사하기도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