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건설장비의 안일식(48)사장은 결혼한뒤 첫아이를 낳자마자 정관수술을
해버렸다.

김포 본토박이인 그가 정관 수술을 한 까닭은 형제간의 재산다툼이
너무나 싫증나서였다.

삼형제중 맏이인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김포들판을 놓고 형제간에
격심한 송사를 벌인데 충격을 받아 첫아들을 낳자마자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 곧바로 실행해버린 것이다.

안사장은 이처럼 자신의 신조를 철저히 실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안사장이 지난주 부도를 냈다.

그의 부인이 기자의 아내와 대학 동기동창이어서 부도소식을 들은 뒤 그를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밤늦게 부천 중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가봤으나 문만 굳게 잠겨 있을
뿐이었다.

며칠뒤 아내를 통해 들은 그의 집안 소식은 너무나 비참했다.

그동안 영국에 유학을 보낸 단하나뿐인 그의 고등학생 아들이 방학을
맞아 귀국을 했다가 부모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학비와 기숙사비용도 조달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국제미아가 돼버린 셈이었다.

안사장은 마지막까지 회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재산과 친인척의 돈을
모두 끌어들였음에도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며칠전 경산 영남대학교 뒷산 과수원의 원두막에서 목매 자살한
김태인(46)사장은 기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달러베이스 리스자금으로 설비를 들여온 까닭에 환율상승에 못이겨
온갖 대책을 펴보다가 끝내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그의 집을 함께 찾아가본 친구들은 한결같이 놀랐다.

그는 끝까지 회사를 살려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티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남겨놓은 재산이라곤 단한푼도 없었다.

안사장과 김사장.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금만이라도 일찍 포기를 했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이들 두사람은 너무나 순진했던게 아닐까.

자신의 주머니에 동전 한푼이라도 남겨놓고 부도를 내는 게 더 똑똑한
일이 아닐는지.

"IMF"이후 우리 주변에서 이같은 가슴아픈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
우리를 안타깝게 만든다.

그런데도 몇몇 미꾸라지들이 낙동강물을 흐려놓고 있어 이런 선의의
부도기업인들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있다.

대리점 유통업등을 영위하는 사업자들중에서 고의부도를 내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검찰이 오는 3월말까지 부도를 낸 중소기업자들에게 형사적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데 꾀를 낸 일부 업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충분히 챙긴채
고의부도를 내고 잠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

유리 건자재 플라스틱등 업종에서 이런 일이 계속되는 바람에
고의부도업체의 어음을 받은 제조업체들이 벼랑에 몰리고 있다.

정말이지 자살할때까지 회사를 살리겠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같이
쇠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도 있다.

고의부도를 내는 사람도 있는 만큼 이제 자살할 정도로 마지막 한푼까지
날려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좀 심한 얘기같지만 이제 적절한 선에서 포기할줄 알자.

기회를 한번만 더 기다려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 중소기업 전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