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30일.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선 강경식 부총리는
외화자금난으로 국가부도 위기에 몰리게 된 점을 사죄하고 조심스레 하얀
봉투를 꺼내 대통령앞에 내밀었다.

사표였다.

외환시장은 이미 마비상태였다.

28일에는 시장이 열리자마자 환율이 가격제한폭까지 폭등한 다음 바로
거래가 끊어졌다.

외환시장 개설 이후 거래가 끊어진 날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29일에도 그랬고 30일에도 그랬다.

한국은행은 이미 29일부터 달러를 "배급"하고 있었다.

이날 김선홍 기아회장은 검찰의 내사설 끝에 사표를 냈다.

강부총리는 언론과 대통령 후보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받고 있었다.

''이젠 당신차례''라는 것이었다.

어떻든 이날의 사표는 삼미 기아 진로에까지 거침없이 강공드라이브를
계속해왔던 당대 최고의 경제관료, 강경식의 좌절이었다.

부총리에 취임(3월5일)한지 꼭 7개월25일만이었다.

그러나 강부총리가 대통령에게 내민 사표는 놀랍게도 "11월19일자"였다.

10월30일에 20일후의 날자로 된 사표가 제출된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었다.

강부총리는 그 날자를 굳이 11월19일이라고 꾹꾹 눌러썼다.

왜 그랬을까.

다음은 강부총리 측근의 증언.

"강부총리에 대한 사임압력이 많았던 때였다.

부총리는 대통령에게 부담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로서는 대통령의 임기가 3개월여밖에 남지 않았고 산적한 현안이
많은데 물러나면 어떻게하느냐며 만류했지만 부총리께서는 굳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려했다"

그러나 이 한장의 사표에 강부총리의 모든 생각이 녹아있었다.

사표는 대통령에 의해 바로 반려되기는 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물러
나야겠다는 뜻의 사표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사표"가 아니라 "출사표"였다.

"부총리의 사표는 IMF로 가는 길을 온몸으로 막아보겠다고 결심한 맹세의
서약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외환위기를 막아보겠으니 그래도 안되면 그때가서 내목을
치라는 결의를 밝힌 문서였다"는게 이 측근 인사의 설멸이다.

그는 사표를 쓰면서 치밀한 두뇌로 일정표를 짰다.

"18일까지 국회에서 13개 금융개혁법안을 일괄 통과시킨다.

외환위기가 급박하므로 한은법등은 다소 논란이 있더라도 국회가 통과시켜
줄 것이다.

사표까지 냈으니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이다.

그러면 19일쯤 대폭적인 자본자유화를 골자로 강력한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한다.

그래도 금융시장이 안정되지 않을 경우 IMF행을 결정한다.

아직 외환보유고가 3백5억달러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대외적으로는 의연히
대처한다"는 수순이다.

그러나 운명은 기이하게도 강부총리가 우려했던 방향으로 굴러갔다.

그는 결국 20일 후인 바로 그날(11월19일) 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고생 많았다. 그만 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의 손에는 이날 발표할 예정이었던 금융시장 안정대책이 들려있었다.

다음은 박병원 당시 부총리 비서실장의 증언.

"강부총리는 사표가 수리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부총리는 19일 발표할 "금융 대책"을 만들기 위해 바로 전날밤 여의도
기술신보 사무실에서 참모들과 새벽3시까지 일했다.

그리고 아침8시15분께 청와대로 달려갔는데 그자리에서 물러나게된
것이다"

사표를 낸 10월30일부터 물러나리라고 운명적으로 예감했던 11월19일 사이
20일동안이 결국 문제였다.

정부는 11월들어 금융기관의 부도를 막기위해 피같은 달러를 1백50억
4천만달러나 퍼붓고 있었다.

"시중에서는 정부가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달러를 마구 쏟아부은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금융기관 부도를 막기위해서였다.

이 기간동안 외환보유고에서 갖다쓴 1백50억달러 대부분이 그랬다"
(윤증현 실장)

국회에서는 계속해서 논란만 벌어졌다.

13개 개혁법안들을 일괄타결해달라는 재경원과 한은법 감독기구설립법을
제외한 나머지만 우선 타결한다는 의원들이 맞섰다.

특히 국민회의는 "강부총리가 외환위기를 빌미로 한은법을 끼워
팔려한다"며 불쾌함을 지우지 못했다.

김원길 의원도 "외환위기를 볼모로 국회를 협박하는 거냐"며 강부총리를
힐난했다.

강부총리측으로서는 운도 나빴다.

한나라당마저 등을 돌렸다.

"한나라당이 대선전략으로 김대통령과의 차별화 전략을 택하면서
금융개혁법안의 통과가 좌절되었다.

한나라당의 최 모의원이 그런 판단을 했던 것으로 안다.

김대통령도 (관련 법안의 통과를 위해)전화 한번 해주지 않았다"고
강부총리 측근들은 당시 관계자들에게 섭섭함을 감추지 않고있다.

물론 금융개혁법안의 일괄통과 주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반론이 많았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같은 이들은 "당시로서는 금융기관 부실처리 등 11개
법률안만 해도 버거운 시기였다.

한은법이나 감독기구통합법을 굳이 일괄처리하려 한 것은 무리"였다고
지적했다.

물론 강부총리가 국회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김기환 순회대사가 강부총리의 밀명을 받아 부지런히 유럽을 들락거리고
있었고 9월 홍콩에서 열렸던 IMF,세계은행 총회 싯점부터는 강부총리
자신이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해 채권단과 외국정부를 설득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였다.

조윤제 교수 등 해외 금융계에 연고가 있는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서울에
있는 외국은행 지점장들을 불러 모으기도 했으나 기대했던 외채 연장 등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미국계 금융기관들은 주한미대사관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계 금융기관들의 동향을 특히 주목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외채연장을 시도해도 말이 먹혀들 턱이 없었다.

무리수도 적지 않았다.

강부총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21세기 국가과제"라는 것을 꺼내들고
전국순회 강연을 나서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패착이었다.

당장의 불길을 잡는 것과 소화기를 갖추라며 연설을 펴는 것은 달랐다.

위기는 발밑을 파고들었으나 그의 이론 취향은 강경식 처방만을 거듭했다.

21세기 과제 항목들은 이미 김영삼 정권초기에 다름아닌 재경원 관료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던 것들이기도 했다.

당연히 "당신도 대통령 유세에 나선거냐"는 세간의 비난이 따랐다.

외환위기가 심장부로 치닫던 11월12일께 김대통령은 드디어 강부총리의
경질을 결심하고 임창열 당시 통산부장관에게 언질을 주게된다.

김대통령은 전직 장관 등 원로들과 강부총리 경질에 관해 상당한 토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융개혁법안은 17일 깨끗이 무산됐고 18일에는 국회가 폐회됐다.

이날 오후 각 언론사에는 "앞으로도 계속 지도편달해 달라"는 요지의 극히
이례적인 강부총리의 편지가 날아왔다.

자신의 사임설을 일축하는 고도의 편지전술이었다.

17일 오후에는 강부총리의 밀명을 받은 엄낙용 차관보가 마닐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닐라에서는 아시아 지역 금융협력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회의에는 일본에서 미스터 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카키바라 대장성
차관보, 미국에서 로렌스 서머스 차관, 스탠리피셔 IMF부총재가 참석했다.

강부총리의 밀명은 IMF가 아닌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보자는
것이었다.

최후의 시도였다.

그러나 엄차관보가 이들로부터 들은 말은 "탈출의 길은 없다.

IMF로 가라"(Come to IMF.No way to escape)였다.

국회가 끝난 18일 저녁 실무자들과 금융대책을 만들고 있던 강부총리에게
엄차관보의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그자리에 있던 관계자들의 얼굴이 흑빛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새벽 3시까지 불길한 예감속에 작업을 계속했다.

"12시쯤 되었을때 김인호 경제수석이 만취한 상태로 여의도 기술신보에
있던 작업실을 찾아왔다.

그는 청와대 비서실에서 회식이 있었다고 했다.

아무도 강부총리가 경질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수석도 아무말이 없었다"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관계자는 밝혔다.

19일 아침 8시15분 강부총리는 밤새도록 마련한 금융대책을 보고하기 위해
수면이 부족한 얼굴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김대통령은 미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기에는 강부총리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같다"고 썼다.

< 정규재.최승욱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