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데일리 미 상무장관과 테오 바이겔 독일 재무장관이 17일 각각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과 독일의 최고위관리 두사람이 같은날 한국땅을 밟는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두사람의 동시 방한은 우연의 일치일수 있다.

하지만 지난 몇달동안 선진국 채권자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던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눈에는 이들의 동시방한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두사람의 동시방문은 마치 유럽과 미국의 대한 외교경쟁을 상징하는것처럼
보인다.

작금의 세계 경제질서는 미국과 유럽의 금융주도권 대결로 요약된다.

라이벌 세력을 동시에 손님으로 맞은 주인의 입장이 결코 쉬울리 없는
상황이다.

두사람을 초청한 당국과 차기정부 책임자들은 그야말로 탁월한 외교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한국은 오랫동안 대미 편향 외교노선을 걸어왔다.

물론 현 정부는 일찌감치 전방위 외교를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금융위기가 도래하면서 전방위 전략은 자취를
감춘 느낌이다.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외채는 독일 프랑스등 유럽 5개국에 1천3백억달러,
미국에 대해 3백23억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대한 채권총액으로 따지면 유럽은 미국의 4배규모다.

유럽은 지난달 뉴욕 국제채권단 협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더구나 유럽은 99년 통화동맹 출범을 앞두고 아시아 금융시장에 대한
장기포석에 이미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여전히 "미국=유일 우방"이란 등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행여 유럽국가들이 한국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서운한 생각을 갖는다면
우리로서는 이로울게 없다.

어쩌면 이 때문에 예상치 못한 파국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한국정부는 유럽국가들에 아무리 못해도 "괘씸하다"는 느낌만은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런만큼 차기 정부 책임자들은 전략적인 균형감각을 유지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또한 두사람의 동시방한은 한국의 대통령 이.취임식을 불과 1주일 앞두고
이뤄진 것이란 점에서 각별한 관심이 모아진다.

문제는 이들을 맞는 사람들이 얼마나 손발을 잘 맞추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은 정부조직 개편논의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차기정부 책임자들이 얼마만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준비중인지 궁금하다.

의전을 비롯한 각종 일정이 명확한 지휘계통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진행될
지 우려가 앞선다.

지금의 한국은 내치 이상으로 외치를 중시해야 할 때다.

더구나 집에 찾아 온 손님에게 어지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이번 두 장관의 방한을 맞아 정부 책임자들은 금융외교의
중요성과 의미를 거듭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지금은 금융외교의 시대다.

이 점에서 두 장관의 방한은 지난달 있었던 뉴욕 국제채권단협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범부들은 외국인사들의 방한을 1과성 행사로 투영하는 습성이 있다.

또 조금 아는 사람들은 이번 두 장관의 방한에 약간의 해석을 가하려
할 것이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한국경제 사정을 현장에서 감지하고 장차 이나라
정치와 경제를 책임질 새정부 책임자들을 만나 채무자로서의 각오와
다짐을 확인해 두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 등이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그보다 훨씬 냉혹하다.

두 사람은 채권자라는 지위를 무기삼아 당근과 채찍을 교대로 들이밀
것이고, 자신들의 행차에 부응하는 대가를 얻어가려 노력할 것이다.

또 이들은 추후의 협상에 대비한 장기적인 포석을 깔고 들어올 것이다.

데일리 장관은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앞세워 통상분야에서의 각종
추가 양보를 요구할 것이고, 바이겔 장관은 유럽에 대한 한국정부의 관심을
좀더 분명하게 일깨우려 할것이다.

이번 손님맞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은 지난 연초부터 금융외교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왔다.

외견상 지금까지의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외신에서는 "3월 금융대란설"을 우려하는 논조들이 나타나고 있다.

김대중 당선자 진영은 내부 정비를 더욱 서둘러야 하는 시점에 있다.

상대적으로 사소한 국내정치 일정에 쫓겨 외치를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전략적인 사고와 전술이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두 사람의 동시방한은 차기 정부 책임자들의 전략감각과
외교역량을 시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