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대기업만 고집할 이유가 없다"

미 대기업 임원들사이에 불고 있는 직장선택의 새바람이다.

상당수 임원들이 고임금과 다양한 특전의 유혹을 뿌리치고 벤처기업 등
중소기업으로 속속 자리를 옮기고 있다.

운신의 폭이 제한된 대기업보다 차라리 장래성있는 중소기업에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보겠다는 도전의식에서다.

세계적인 통신회사 알카텔 알스톰 그룹의 중역을 지낸 지저스 레온이
대표적 경우이다.

레온은 1년전 "시에나"라는 조그만 정보통신회사의 제품개발 책임자로
새롭게 출발했다.

연봉은 25% 정도 깎였다.

비서 2명과 함께 연간 2억달러정도의 판공비도 사라졌다.

회사가 제공하던 고급승용차대신 아내 소유의 구형 벤츠를 빌려타는 신세가
됐지만 레온은 요즘 행복감에 젖어 있다.

전 직장과 달리 시에나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로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하면서
일에 대한 성취감을 한껏 맛볼 수 있어서다.

"알스톰에서 이름도 모르는 1천2백명의 직원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시에나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낫다"

미 투자은행 뱅커스트러스트 상무로 일했던 빌 필리는 얼마전 "윗캐피털"로
자리를 옮겼다.

윗캐피털은 기업공개 등 기존 금융서비스를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는
소규모 회사.

전직과 함께 수십만달러의 연봉은 옛날 얘기가 됐다.

직급도 이사로 강등됐다.

그러나 한번도 전직을 후회한 적은 없다.

전 회사에서 쌓은 금융기법을 인터넷이라는 첨단매체와 연결시키면서
일에 매료돼 있어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줄 미처 몰랐다"

미 지역 전화회사인 퍼시픽벨사 사장이었던 데이비드 도만도 얼마전
소규모 인터넷서비스회사의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했다.

연봉이 퍼시픽벨사의 30% 수준으로 대폭 줄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랜 역사의 전화사업과 달리 인터넷사업은 시작단계이다.

얼만큼 더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새 회사에서 제공한 스톡옵션으로 잘만하면 돈방석에 앉을 가능성도
높다.

존 오닐 컨설턴트는 "최근 대기업 임원들로부터 전직과 관련, 상담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며 "대기업에서 불안한 직장생활을 하느니 업무 만족도도
높이고 스톡옵션으로 거액을 챙길 수 있는 벤처기업 등으로의 전직을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닐은 특히 기술은 있지만 경영노하우가 없는 벤처기업들로부터 수요가
늘어나 대기업 임원들의 중소기업행이 줄을 이을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직장선택의 새 풍속도는 대량해고사태에 바짝
움츠러든 우리나라 대기업 임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김수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