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까지 26개대기업이 6대 시중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었다.

이달에는 27개대기업이 약정을 체결한다.

은행이 기업을 지배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뜻이다.

재무구조개선약정은 다른게 아니다.

기업이 부채비율감축 및 차입금상환 계획 등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은행과
약속하는 것이다.

약속을 어길 경우 제재는 엄청나다.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고 신규대출을 중단해 버린다.

기업에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어쩔수 없다.

이미 약속을 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다.

은행은 기업의 약속이행을 점검하기 위한 무소불위의 권리를 가진다.

계열회사의 사업장은 물론 장부까지 뒤질수 있다.

한마디로 은행이 기업경영을 감시하고 지도하는 시대가 됐다.

지난달 24일 호텔롯데에서 열린 H은행의 재무구조개선약정에 관한 설명회는
이런 변화를 실감케 한다.

이 은행의 주거래기업 오너회장들이 거의다 참석한 것이다.

은행의 기업경영감시는 어쩌면 당연하다.

채권자의 권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의무다.

"예금자의 돈을 관리하는 은행이 제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서도 그렇다"(이덕훈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어떻게 보면 때늦은 감도 있다.

엄청난 돈을 빌려주면서도 기업들에 질질 끌려갔던 은행들의 실상을 감안
하면 이제야 제위치를 찾아가는 시작에 불과하다.

더욱이 대기업의 엄청난 차입경영이 경제위기를 불러온 한 원인이었던 점을
부정할수 없다.

지난 96년말 현재 은행여신이 2천5백억원을 넘는 대기업(49개)의 총자산은
3백71조1백65억원.

이중 자기자본은 74조6천2백73억원(평균 자기자본비율 20.1%)에 불과하다.

나머지 2백96조3천8백92억원은 은행 등 외부에서 빌려쓰고 있다.

자기자본의 무려 3백97.2%(평균 부채비율)에 이른다.

자기돈은 20%만 가진채 나머지 80%는 외부에서 빌려 몸집을 부풀려 왔던
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감시자가 없었다.

"대마불사"의 신화만 존재했다.

차입은 곧 성장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차입이 일시에 중단되자 그룹 전체가 무너졌다.

그룹에만 그치지 않았다.

금융기관들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대기업부도-금융기관부실화-다른 대기업부실화"라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결국은 외환위기로 연결됐다.

한보사태로 시작된 바로 작년이 그랬다.

IMF도 바로 이점을 문제삼았다.

김대중대통령이 그토록 대기업구조조정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에서다.

기업들의 방만한 차입경영관행을 손질하지 않으면 기업경쟁력, 나아가
국가경쟁력강화는 요원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나온게 바로 은행의 기업지배다.

정부가 총대를 메는것보다는 은행이 나서는게 순리라는 판단에서다.

기업들의 아킬레스건인 "대출"을 무기로 구조조정의 칼을 빼든 것이다.

문제는 졸속과 부작용이다.

차분한 준비 없는 과욕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게 그동안의 교훈이다.

우선은 시간이 없다.

기업들은 불과 일주일만에 앞으로 5개년 동안의 청사진(재무구조개선계획)을
세워야 했다.

은행이 기업들을 감시하고 지도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주거래은행과 기업의 관계가 미미하다.

연결끈이라곤 여신이 전부다.

일본이나 독일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주거래은행과 기업의 상호주식보유
가 제한돼 있다.

주주협의회 등의 매개장치도 없다.

오로지 채찍만 갖고 기업을 다스리라는 꼴이다.

게다가 은행자율화는 아직도 먼 얘기다.

김대통령이 은행장 인사에 개입하지 말도록 강조한 것도 이를 반증한다.

은행에 대한 정부간섭이 계속된다면 ''은행지배''는 ''정부지배''로 변질될
뿐이다.

은행의 기업지배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러나 실질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은행의 기업지배는 "신관치금융"의 다른 말에 그칠 수도
있다.

<하영춘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