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구호와 함께 선포식을 여는 등 떠들썩한 잔치까지 벌였던 "문화비전
2000기념사업".

지난해 10월 시작된 이사업은 몇개월도 지나지않아 벌써 흐지브지됐다.

2000년까지 2백억원을 투입한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올해 예산은 10억원도
채 못된다.

사업도 14개에서 슬그머니 3~4개로 줄었다.

구호성 문화정책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신한국문화건설", "문화의 르네상스시대 실현", "문화복지 구상" 등
문화체육부 시절 쏟아낸 슬로건만 해도 셀수조차 없다.

장관이 바뀔 때면 으레 새로운 구호를 들고 나온다.

그에 맞춰 문화정책은 뿌리부터 뒤바뀐다.

중장기계획만도 90년 문화발전10개년 계획, 93년 새 문화창달 5개년계획,
96년 문화복지 구상을 발표, 문화예술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문화복지와 관련된 사업은 모두 54개나 된다.

무려 17조원이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정책이다.

계획대로라면 97년까지 공공도서관 4백30개, 지방문예회관 71개를 새로
세워야한다.

문화학교도 2백개나 지정해야 한다.

문화복지기금을 만들고 문화복지지수를 도입하는 내용도 포함돼있다.

그러나 현실은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97년말 현재 공공도서관 1백11개, 지방문예회관 12곳만 겨우 지었을 뿐이다.

음악평론가 탁계석씨는 "그동안 추진한다고 밝혔던 각종 구호성 정책의
대부분은 결과적으로 뜬구름잡는 얘기였다"며 "작은 사업이라도 내실있게
운영하는게 중요하다"고 꼬집었다.

정책담당자들은 예산문제가 걸림돌이라고 변명한다.

전체예산대비 1%에도 못미치는 문화예산으로 굵직굵직한 사업을 어떻게
꾸려갈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예산 핑계만 댈게 아니라는것이 예술계의 시각이다.

지역 문예회관의 공연활성화를 위해 국고지원으로 만든 프로그램 뱅크사업.

형식적으로 지난해 31건의 연극 음악을 무대에 올렸다.

반면 각 극장과 문화단체들이 모여 만든 문예회관연합회는 연수 교육활동과
오페라공동제작 프로그램교환사업등 알찬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문체부가 지난해 공들여 만든 공연예절 준수규약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또 청소년보호법 등 각종 법제를 의원입법으로 만드는 것도 관행처럼
굳어졌다.

지방자치단체는 문화예산확보가 더욱 어렵지만 오히려 활발하게 문화정책을
펴는곳이 많다.

구청이나 읍 면동사무소를 문화센터로 만들고 축제를 벌여 주민화합을
모색하는 등 알찬 사업들을 펴고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문화에 귀기울일수있는 마인드라는 결론이다.

연강홀 극장장 조경환씨는 "정부가 해야할 일을 민간이 스스로 알아서
하면 훨씬 효율적"이라며 "정부는 규제를 줄이고 자율적인 분위기를 보장,
창작활동을 지원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한예로 1920년대 영국이 IMF구제금융을 받았을 때 오히려 극장관객은
늘었다.

어려울때일수록 문화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정부가 지속적인 지원정책을 펴
극장의 티켓값을 내린 탓이다.

힘든 때일수록 국민들을 감싸안는 내실있는 문화예술정책이 절실하다는게
문화예술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 오춘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