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공무원 공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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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삶의 길은 입신양명이었다.
일단 과거에만 급제하면 관직과 권세와 명성은 저절로 뒤따랐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특권층에 한정된 것이었고 서민들에게 있어서
입신양명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들은 살림에 아쉬움이 없을 정도의 재산을 모아 단란한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차선책을 택해 부지런히 살았다.
이처럼 물질생활의 안정을 추구하는 생각은 그들이 재화를 무엇보다
중시하게했고 이기적이 되게 만들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수 있다" "돈이 장사라" "돈이 제갈량"이라는
속담이 요즘도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돈을 중시하는 관념이
근대사회 들어와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 뿌리가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벼슬에 대한 미련을 깡그리 지워버린 것은 아니다.
벼슬보다 돈이 낫다는 "호관이 불여다득전"이라는 속담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는 벼슬을 탐내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자위하는
냄새가 더짙게 풍긴다.
"관리"나 "관원"이라는 말보다 시새움에서 나온 경멸의 뜻을 가진
"벼슬아치"라는 말을 많이 쓴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아도 좋을듯 싶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비슷하겠지만 어떻든 한국인들의 "관직"에
대한 미련은 예부터 "돈을 주고라도 사고싶을" 만큼 유별나다.
요즘 새정부의 미관말직이라도 한자리 얻어보려고 동분서주하는 인물들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9급 공무원 공개시험 응시원서 접수를 마감한 결과 1천1백명 선발에
8만8천14명이 지원해 사상최고인 80대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고 한다.
교육행정직(3백53대1) 건축직(2백94대1) 세무직(2백71대1) 순으로 경쟁률이
높은 반면 소년보호직(19대1)은 상대적으로 낮은 경쟁률을 보이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맹자"에는 "사비위빈"이라는 말이 있다.
관리는 가세가 빈한해 녹을 타먹기 위해서만 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취업난이 심하다지만 공무원이 되겠다고 몰려든 지원자들이
"국민의 심부름꾼"이 될 각오는 돼 있는지 묻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9일자).
일단 과거에만 급제하면 관직과 권세와 명성은 저절로 뒤따랐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특권층에 한정된 것이었고 서민들에게 있어서
입신양명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들은 살림에 아쉬움이 없을 정도의 재산을 모아 단란한 가정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차선책을 택해 부지런히 살았다.
이처럼 물질생활의 안정을 추구하는 생각은 그들이 재화를 무엇보다
중시하게했고 이기적이 되게 만들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수 있다" "돈이 장사라" "돈이 제갈량"이라는
속담이 요즘도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돈을 중시하는 관념이
근대사회 들어와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 뿌리가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벼슬에 대한 미련을 깡그리 지워버린 것은 아니다.
벼슬보다 돈이 낫다는 "호관이 불여다득전"이라는 속담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는 벼슬을 탐내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자위하는
냄새가 더짙게 풍긴다.
"관리"나 "관원"이라는 말보다 시새움에서 나온 경멸의 뜻을 가진
"벼슬아치"라는 말을 많이 쓴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아도 좋을듯 싶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비슷하겠지만 어떻든 한국인들의 "관직"에
대한 미련은 예부터 "돈을 주고라도 사고싶을" 만큼 유별나다.
요즘 새정부의 미관말직이라도 한자리 얻어보려고 동분서주하는 인물들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9급 공무원 공개시험 응시원서 접수를 마감한 결과 1천1백명 선발에
8만8천14명이 지원해 사상최고인 80대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고 한다.
교육행정직(3백53대1) 건축직(2백94대1) 세무직(2백71대1) 순으로 경쟁률이
높은 반면 소년보호직(19대1)은 상대적으로 낮은 경쟁률을 보이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맹자"에는 "사비위빈"이라는 말이 있다.
관리는 가세가 빈한해 녹을 타먹기 위해서만 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취업난이 심하다지만 공무원이 되겠다고 몰려든 지원자들이
"국민의 심부름꾼"이 될 각오는 돼 있는지 묻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