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건국의 기틀부터 잘못된 것같다.

단종 사도세자 연산군 광해군등으로 이어지면서 발생한 일련의 비극들은
건국 초기부터 배태된것이 아닌가 한다.

양녕의 권력허무주의는 풍류를 알고 끼가 있는 그의 인간적인 체질도
체질이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형제들간의 권력다툼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삼촌들까지 죽이는 아버지로 인해 상처 받으며 자란 성장기가 기행과
광기로까지 확산되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양녕은 자신에게 언제 위해가 가해질지 모른다는 잠재의식으로 인해 앞질러
반발하고 문제를 일으켜 폐세자의 길을 달려갔다.

그때 이미 그는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쟁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이 살길이요 아버지를 닮지 않고 인간답게 사는 길인 것으로
판단했던것 같다.

양녕은 문학적으로 볼 때 가장 인간답고 멋있는 세자였다.

방원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는 왕실의 기틀을 세운다는 명분아래
아들도 내칠 수 있는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결국 그 가능성의 피가 영조에게까지 흘러가서 급기야 사도세자의 비극을
낳은 것이 아닐까.

양녕은 동생 세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본격적으로 기행과 광기를 발휘한다.

이는 세종의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란 견해도 있지만 역시 지존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 결코 왕권에 도전해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마음이
없다는 표현의 방식으로도 볼 수있다.

상처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이처럼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직접보다 간접이 더 깊고 넓은 상처의 부위를 만들어 주는 경우도 있다.

가학의 피해자였던 언니의 이혼이 준 충격으로 인해 평생 혼자사는 동생의
경우도 바로 이런 것이다.

뿐더러 이상한 피해의식으로 인해 모든 인간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면 음성적인 보복을 일삼는 친지를
옆에서 보고 상처와 좌절감의 경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실감하게 된다.

우리들은 이때까지 문제가 많고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해 받은 직.간접
상처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앞으로 그 후유증이 나타날 것이 무엇보다
두렵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