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허리를 부러뜨리는 것은 바늘이다"

미분경제학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물론 바늘 하나가 낙타 허리를 부러뜨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낙타허리위에 이미 많은 짐들이 실려 붕괴직전의 분기점에 서 있는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추가된 바늘 하나가 결정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속된 예로 술마시다 정신을 잃느냐 여부는 결국 마지막 한잔이 결정적인
것과 같은 이치다.

어찌됐건 한국경제의 허리는 부러졌고 IMF의 관리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기존의 무거운 짐과 바늘이 어우러져 한국이라는 낙타허리를 부러뜨렸던
것이다.

무거운 짐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를 추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국정을 책임지고 있던 대통령이 가장 무거운 짐이었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사건건 당리당략을 앞세우며 갈길 바쁜 여당 발목을 잡고
늘어지던 당시 야당지도자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새정부가 노사정합의를 이뤄낸 것은 사실이지만 구여권이 노동관련 법률을
통과시키려 할 때 야당인 국민회의가 국회 의사당을 점거하고 실력행사를
했던 것은 아직도 그 기억이 새롭다.

한나라당이 국무총리인준을 편법으로 반대한 것과 아무 다를 것이 없다.

무절제한 해외여행과 유학물결.고가의 위스키에 맥주를 섞어 부어 각
브랜드가 지닌 독특한 향기를 알 수 없게 만든 폭탄주는 무절제한 과소비의
상징 그 자체였고 우리 경제의 무거운 짐중 하나였다.

급전직하의 반도체경기, 부실화된 고속전철, 한보 기아 등의 마비,
끊임없이 이어지던 노사분규, 금융기관의 무책임한 부실대출, 과욕이 불러온
기업들의 무모한 투자경쟁..

별로 들을 것도 없는 해외 석학강사 모시기에 여념이 없던 각종 연구소와
이른바 지식인들 또한 달러 쓰기에 여념이 없던 장본인들이다.

심한 경우 경쟁이 붙어 한물간 해외연사를 불러들이는데 수십만달러씩
제시해 가며 줄다리기를 벌인 예도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허황된 지적 사치를 구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뜻이다.

국정의 갈피를 잡아 주어야 할 시기에 양비론과 양시론으로 일관한 언론.

기다리면 때가 무르익고 자연스럽고 품위있게 획득할 수 있었던 OECD
멤버십.

소득 1만달러라는 무지개 간판 또한 사람들의 간을 배밖으로 나오게 한
무거운 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까지 애꿎은 바늘 찾기를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깃털에 불과했던 당시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 그리고 몇몇
해당관리를 희생양 삼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의 로렌스 서머스 부장관이 최근 한 강연에서 한국경제몰락의
책임자를 찾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촌평을 했다는 소식은 우리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든다.

한국경제위기를 자동차 사고에 비유한 그는 "날씨가 나빠 시야가 좋지
못했고 도로도 불량했고 자동차의 성능마저 문제가 있었는데 운전하던
사람만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꽉찬 "만원극장론"도 설득력 있는 묘사중 하나다.

극장에 사람들이 꽉 들어 찼는데 누군가 "불이야" 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서로 먼저 빠져 나가려고 아우성치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에 돈을 빌려줬던 외국인들이 서로 먼저 탈출하는 과정에서 한국극장의
시설물이 모조리 부서지며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소리다.

경상수지가 적자를 내는 것은 어느 정도 감내 할 수 있지만 자본수지의
적자는 경제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외국돈은 밀물처럼 밀려도 들어오지만 또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극장에 화재가 나지 않게 밤샘없이 예방
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또 화재가 났더라도 신속하게 대응하며 사람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길 수
있도록 했으면 낙타허리가 부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 또한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한국낙타 등에 아직도 많은 짐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짐들이 아직 그대로 실려있는 상태인 것이다.

은행들이 갖고 있는 해외부채의 만기연장이 어느정도 안정궤도를 찾았다.

하지만 이는 낙타등에서 바늘을 들어 낸 정도라는 지적이다.

우리 경제는 아직까지 촘촘한 지뢰밭은 헤메고 있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우리 금융기관들이 수십억 달러나 대출해 주고 물려있는 인도네시아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으며 중국의 위앤화평가절하 가능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이다.

건설경기는 바닥을 기고 있고 자동차 내수침체, 원자제 절대부족은 우리의
경제기반 자체를 흔드는 요인이다.

리스 투신 종금 생명보험 등도 언제 어떤 형태로 어려움을 겪을지 모르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분위기가 흐트러지기 시작해서 걱정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외국기자들은 한국을 "까마귀가 없는 나라"라고 부른다.

쉽게 잊어버리는 한국사람들이 까마귀를 모두 잡아 먹었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또다시 제2의 외환 위기를 맞으면 우리는 끝장이다.

실익없는 바늘찾기를 이제 그만두고 낙타 등에 실려있는 무거운 짐부터
조속히 걷어내야 할 시점인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