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그룹의 부채비율 축소시한을 3년 앞당기기로한 은행감독원의 지침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은감원의 지침에는 구조조정을 앞당기겠다는 현정부의 의지가 투영돼 있다.

당초 계획대로 5년에 걸쳐 부채비율을 감축해 갈 경우 정권말기의 행정공백
으로 자칫 용두사미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감도 작용한 것을 풀이된다.

하지만 재계는 환율급등으로 원화로 환산한 부채가 늘어나는 바람에 부채
비율이 높아졌는데 이를 내년말까지 앞당겨 2백%로 낮추라고 하면 방법이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공정위나 은행들도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는 정부의 ''부채 조기 축소 방침''을 현실과 동떨어진 조치라고 비난
하고 있다.

모그룹 관계자는 24일 "은감원의 이번 조치는 달성하지 못할 과제를 주고
못지키면 벌을 주겠다는 식"이라며 "국내 기업들을 이렇게 벼랑으로 모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면 이같은 불만은 이해가 간다.

지난 97년말 기준 30대 그룹의 주거래은행 부채비율은 4백49.4%.

이를 20개월여안에 2백%로 낮추는 것은 지금의 현실로 볼때 불가능하다.

부채비율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본금을 늘리거나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

지금으로선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는데 기업들의 고민이 있다.

우선 증시를 통한 유상증자의 경우 지난해 국내에서 발행된 유상증자
주식총액(액면가 기준)은 1조9천억원에 불과했다.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부채를 갚기 위해 계열사나 부동산을 파는 것도 마찬가지다.

매물만 쌓이고 매입자는 찾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재계 일각에선 정부 스스로 정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부담을 무릅쓰고
이 지침을 내놓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지적한다.

모그룹 관계자는 "은감원의 이번 지침이 김대중대통령이 지난 21일 대기업
구조조정의 강도가 약하고 속도가 느리다고 지적한 직후 나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대통령의 ''한마디''를 적극 보좌하기 위한 ''과시용''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재계에 팽배해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그룹 관계자는 "지난달 주거래은행과 재무구조개선협약을 체결할
때도 기업들은 시간적인 여유를 달라고 호소했었다"며 "한달만에 약정
기준을 변경하는 정책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업에 예측할 수 있는 일정을 알려주고 장기 계획을 짜도록 지원해 줘야할
정부가 앞장서서 정책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업들은 이같은 불만과 함께 이번 조치가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김세진 연구위원은 "부채비율이 높을 경우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다면 외국 금융기관들은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에는 달러를 절대
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외자도입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의 한 축이 무너질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부채가 과다한 기업은 앞으로 신규대출에 있어서도 불이익을 피할수
없고 그럴 경우 해당기업의 자금난은 가중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지난달 서둘러 주거래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었던 30대그룹은
백지상태에서 다시 재무구조개선계획을 짜야 하는 상황이다.

이달중 신규로 약정을 맺기로 했던 31~61위의 중견그룹들도 준비해 왔던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폐기하고 부채비율 대폭 축소를 골자로 하는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액션플랜은 뒤로 접어둔채 "계획"을 짜는데 시간을
다 허비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 권영설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3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