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감독원이 각 은행에 하달한 기업 구조조정 지침이 알려지자 재계는
경악하고 있다.

이 지침이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상 "그룹 해체"를 초래할 수도 있는
메가톤급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자율적인 구조조정의 여지를 완전히 없앤 조치"라며 "과연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계가 은감원의 지침 중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인위적인 계열사
정리 부문이다.

은행이 거래하는 그룹에 대해 재무구조 양호계열사와 부실징후 계열사로
구분하고 부실계열사는 정리한다는 내용이다.

은감원은 재무구조양호계열로 분류되더라도 주력기업위주로 한번 더 정리해
슬림화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를 위한 무기로 동일계열 여신한도를 국제수준으로 감축하라는 조치까지
내렸다.

현재 1개 그룹에 대해 자기자본의 45%까지 빌려줄 수 있는 것을 앞으로는
25%까지 낮추도록 한 것이다.

"부실"한 계열사에 대출한 돈은 즉시 회수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대기업그룹은 소그룹화되거나 사실상 해체될 수 밖에 없다.

모그룹 관계자는 "성장성을 내다보고 모험적으로 투자한 회사는 모조리
정리가 불가피해졌다"며 "은감원 기준대로라면 특히 장치산업은 다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불만을 토했다.

은감원의 조치가 기업의 자율적인 구조조정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도
재계가 반발하는 이유중 하나다.

그룹의 사업구조에 상관없이 "우량기업부터 매각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이
우선 그렇다.

또 기업 최고경영자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법을 개발하라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지적이다.

기업들은 이번 조치를 포함해 새정부의 대기업정책이 계속 혼선을 빚고
있는데 대한 불만이 극도로 고조돼 있다.

모그룹 관계자는 "개혁을 한다면서 동참하려는 세력까지 벼랑으로 몰고
있다"며 "이렇게 조령모개식으로 자주 정책을 바꾸며 기업을 흔들어서는
구조조정은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새정부가 그동안 추진했던 정책들을 보면 재계의 이런 불만은
설득력이 있다.

집권당의 정책위의장이 "빅딜(그룹간 사업교환)"을 안하면 도태할 것이라고
경고한지 한달이 못돼 최고위층은 "빅딜은 말한 적 없다"고 했다.

국회가 지난달 정리해고제가 포함된 노동법을 통과시켰지만 노동부장관은
30% 이상의 정리해고는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조하면서 대주주로 물러나 있던 회장들을 속속 대표
이사에 복귀시킨 것은 바로 정부다.

구조조정 계획은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라고 했다가 "계획을 내지 않으면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정부다.

정부내에서도 이제까지 정책 혼선이 계속됐다는 얘기다.

어쨌든 기업들은 날이 새면 새로 나타나는 대기업정책에 이제 지친 표정
이다.

더구나 국내에 공장을 세우겠다는 외국 기업인들은 칙사대접을 하는 최근의
풍토도 부담스럽다.

"이런 상황이라면 외국에 본사를 차리고 외국기업으로서 한국에 진출하는
것이 백번 낫겠다"며 모회사 사장은 머리를 흔들고 있다.

<권영설 기자>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3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