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국

금융기관의 회계감사를 할 수 있는 국내회계법인 자격을 미국 최대
회계법인 빅6과 제휴한 국내회계법인 6개로 제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최근 신문지상에 게재된 바 있다.

만약 이러한 움직임이 논의 단계를 넘어서 입법화로 연결된다면 이는 곧
시장경제체제에 반하는 비효율적인 정부 간섭의 또다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외형적인 크기에 따라 일률적으로 업무 영역을 제한하자는 주장은
재정경제부를 비롯한 정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든 "규제를 위한 규제"를 양산한 구태의 연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역행하는 정부의 모습과 함께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규제 논의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국내 몇몇 대형 회계법인들이
IMF관리체제를 핑계삼아 회계감사 서비스의 경쟁을 제한하는 독과점
체제를 구축하려는 모습이다.

우리 경제가 이렇게 어려움에 빠지게 된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모든 원인은 낮은 효율성에 기인한다.

우리나라의 낮은 효율성의 상당부분은 자유로운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에서 비롯되었다.

우리에게 차관을 제공하는 IMF와 외국인 채권자들이 빌려 준 돈을
확실하게 받기 위한 첫번째 요구는 "규제위주의 관리경제 체제를 자유로운
시장경제에 맡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의 6개 대형 회계법인에 한정하여 금융기관의 감사를 맡기는
제도는 자유로운 경쟁원칙을 저해하는 것이고 특별히 이것은 IMF가 우리
정부에 요구한 사항도 아니다.

그렇다면 금융기관 감사업무 수임을 제한하는 발상을 하게 된 논리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는 현재 위기에 처해 있는 금융기관이 국제적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선 가장 큰 6개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이 논리는 전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부실의 대명사인 금융기관의 감사중 약 94%를 이들 6개
대형 회계법인이 실시해 왔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볼때 이러한 논리는 전혀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가 경험하고 있는 외형을 중시한 대기업 중심의 정책 실패에
하나를 더할 뿐이다.

감사업무 수임을 제한하자는 논의의 또다른 근거는 외국인들이 원하는
것이 소위 빅6이 감사한 감사보고서이며 이들이 발행한 보고서만이 국제적인
신인도를 보장한다는데 있다.

따라서 IMF체제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이기
위해서라도 미리 이런 규제를 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설득력이 없다.

첫째, 국제적인 신인도를 얻고 있는 회계법인이 세계에 6개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제 금융기관인 IBRD, IMF, ADB 등은 빅6에서 작성한 감사보고서외에
다른 자격을 갖춘 회계법인에서 작성한 감사보고서를 받고 의사결정을
하는데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국제적인 금융기관과 투자기관이 인정하는 회계법인은 소위 빅6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둘째, 금융기관이 회계감사를 받는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채권자와
투자자, 그리고 금융기관과 거래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함에
있어 객관적으로 도움이 되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특별히 금융기관간의 경쟁이 국제적으로 치열하고 외화차입과 외국인의
자본투자가 필요한 시점에서 어느 회계법인을 선임할 것인지는 법이나
규정으로 정할 필요가 없다.

금융기관들은 감사에 드는 비용과 객관적인 회계기관의 인지도,
감사보고서를 요청하는 외국인 투자자나 기관의 개별적 요청 등에 따라
회계감사자를 선임할 것이다.

정부는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특정 회계법인을 선택하도록 간여할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의 자율에 맡겨야 할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자율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자율권 남용으로
빚어지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묻는 심판의 역할로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 투자를 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정보의 투명성과 더불어 자유롭게 투자결정을 할 수 있는 간결하고 편리한
제도의 확립이다.

금융기관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감사기관의 공정성과
신뢰성이다.

공정성과 신뢰성은 감사기관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IMF를 비롯한 외국기관들은 우리에게 인위적인 경쟁제한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규제라도 가능하면 철폐해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함으로써 경제의 흐름이 왜곡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3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