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기업 경영관행에 일대 변화가 오고 있다.

오너의 1인 지배로 이뤄졌던 일상적인 경영행위에 제동이 걸렸다.

제대로 된 절차를 지킬 것과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해야할 의무가 부과된
것이다.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을 비롯, 이사회 모습도
달라졌다.

국내 5대그룹의 한 계열사 이사회 잠행기를 통해 변모된 이사회풍속도를
들여다 본다.

"김준수 이사(전무.이하 가명)께서 임시의장을 맡아주시죠"

지난달말 K사 임원회의실.

마이크를 잡은 정철규 사장은 이렇게 이사회를 시작했다.

상근임원중 연장자인 김전무에게 사회를 맡긴 것.

평소 스스로 사회를 맡아 주재했던 이사회였다.

더구나 그는 지난 1월 그룹 인사에서 사장으로 결정돼 실질적인 사장업무를
수행하고 있던 터였다.

느닷없이 임시의장을 맡게된 김 전무는 멋적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7명의 멤버중에는 생소한 얼굴도 한 사람있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P대 오세정교수가 사외이사로 자리를 함께 한것.

예전과 다른건 또 있었다.

외부에서 불러온 속기사도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처리할 첫 안건은 대표이사 선임.

김 전무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사들에게 대표이사 추천을 주문했다.

문정기 이사는 정철규 사장을 추천했다.

"정 사장은 미국에서 13년동안 전자회사에 일했고 지난 2년동안 우리회사의
신제품개발을 주도해 매출을 매년 50%이상 늘렸습니다"

문 이사는 정사장의 경력과 업적을 자세히 소개했다.

김 전무는 나머지 이사들에게도 차례차례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을 추천할 생각이 있습니까"

한사람도 반대의사가 없다는 것을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정 사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됐다는 것을 선언하고 김전무는 의사봉을 넘겼다.

의사봉을 건네받은 정 사장은 두번째 안건을 상정했다.

25명의 임원진(집행위원회)을 구성하는 건.

김준수 전무에 경영관리업무를 맡기기로 하고 새로 이사가 된 이정식씨는
유럽지역 마케팅담당으로 천거했다.

그때까지 잠자코만 있던 비상임이사가 발언권을 신청했다.

그는 그룹의 2인자인 B부회장.

"B이사님, 말씀해 주시죠"

정 사장의 말씨는 공손스러웠으나 여태 한번도 그를 "이사"라는 호칭으로
불러 보지 않았다는걸 상기한듯 몹시 거북스런 표정이었다.

"이 이사는 유럽경험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그일을 맡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정 사장은 일순 당황했다.

"이 이사는 지난3년간 미주영업을 해오면서 좋은 실적을 거뒀습니다.
새로운 주력시장인 유럽쪽을 뚫는데 적임이라고 봅니다"

설득에 가까운 설명이었다.

듣고난 B부회장이 덧붙였다.

"이젠 이사회도 예전처럼 대충 넘어가는 식이어선 안됩니다. 임원업무분장
도 제대로된 형식과 절차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마지막 안건은 이사회의 역할과 집행위원회의 기능을 명확히 구분짓는 일.

이사회는 회사의 기업가치와 주주권익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경영을
감독하고 임원진은 이사회 결의에 따라 전반적인 경영을 맡는 쪽으로
정리됐다.

물론 전에 없던 안건이다.

정 사장이 이사회를 끝낼 생각으로 특별히 더 논의할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사외이사가 나섰다.

"시간을 내서 회사의 전반적인 경영현황을 설명해 주세요. 현재 안고 있는
문제나 장기적인 비전도 함께 제시해 주면 좋겠어요"

정 사장은 1주일후쯤 날을 잡아 알려드리겠다고 답하면서 의사봉을 세번
두드렸다.

이사회가 끝난 것이다.

그때 시계바늘은 오후 5시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4시에 시작한 회의였다.

예전 같으면 차 한잔 마시면서 5~10분이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동안 이사회 참석 멤버들의 모든 발언은 토씨하나 빠트리지 않고 속기록
에 기록됐다.

의사록을 만들어 이사들 한사람 한사람의 확인도장을 받아둬야 하기 때문.

과거처럼 대충 요지만 적은 의사록은 이제 더 이상 만들어질수 없다.

빠짐없이 기록해야 나중에 이사회 결정이 문제가 됐을때 써먹을수 있다.

잘못된 일에 책임질 일이 생기면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는 근거를
남겨야 면책될수 있다.

정 사장은 미국에 있을때 흔히 보았던 이사회 모습을 이날 한국에서 처음
경험했다.

< 손희식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