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계회의 (상) ]]

61년 3월24일 오후 7시 반도호텔 8층 장면 총리 집무실.

감색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신중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같은 호텔 5,6층을 임대해 쓰고 있는 한국경제협의회 회장단이었다.

김연수 회장(삼양사회장)을 선두로 이한원 부회장(대한제분사장)의 거구가
뒤를 따랐다.

김주인 사무국장 윤태엽 기획.총무부장이 서류뭉치를 들고 제 자리를
찾았다.

1~2분이 채 못돼 장 총리와 정부인사들이 나타났다.

장총리는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늘 그랬듯 단정한 차림이었다.

주요한 부흥장관겸 상공장관 김영선 재무장관 등 핵심각료들이 자리에
앉았다.

이태용 민주당정책위의장 김용주 참의원 원내총무도 보였다.

경제난 극복을 위한 "긴급 비상대책회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얼굴이 밝지 않았다.

회의시간 절약을 위해 이미 저녁 식사도 끝낸 뒤였다.

장총리가 개회인사 형식을 빌려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민주당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고 정치사회상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가 잘돼야 합니다.

잠재실업까지 포함하면 지금 실업률은 15%가 넘습니다.

구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이북을 따라잡기 위해서도 경제제일주의를
반드시 실현시켜야 합니다.

실업인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윤태엽씨는 나중에 "장총리가 상당히 조급하게 재계의 지원을 원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그날만 해도 소위 "4월 위기"에 대한 해설, 기획기사
들이 신문을 가득 메울 정도로 사회적 불안이 심각했다.

4.19 1주년이 다가오면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날 것이라든지, 심지어
군대의 동향도 심상치 않다는 별의별 뜬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이무렵 일어난 미대사관 앞 투석사건, 장총리 사택 난입시도 등으로 수도
치안도 말이 아니었다.

각 지방에서도 4월 위기설이 파다해 전국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장총리의 인사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김회장이 일어섰다.

"총리의 경제제일주의 방침에 우리 실업인들은 적극 찬동하는 바입니다.

경제제일주의는 윤리적 뒷받침만 있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작금의 민심불안은 춘궁기를 맞아 절량농가가 크게 늘고 실업률이 급등한
것이 주원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기업인들은 우선 구호양곡을 긴급 지원키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또 예산에서 염출키 어려운 시국안정자금도 거출할 용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총리께서는 정치와 사회 안정에 총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회장의 말이 끝나자 장총리와 정부 여당 참석자들의 얼굴엔 비로소
안도의 기색이 돌기 시작했다.

어렵게 모임을 주선한 김용주 의원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정부는 민간 경제계에 바로 이 두가지, 즉 구호양곡과
시국안정을 위한 정치자금을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의 사후처리에 엉켜 차마 요청할 수 없는 처지였다.

특히 허정 과도정부에서 넘어온 부정축재자 처리문제에 대해 재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부탁한다고 해도 순순히 들어줄지 의문이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재계가 앞장서 이 두가지를 내놓겠다고 하니 반가울 수밖에.

정계와 재계의 대표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앉자마자 시국안정을 위한
해결책이 가닥을 잡게 된 것이었다.

내가 직접 참석하지도 않은 이 회의를 회고록의 첫머리에 소개하는 것은
이 회의가 대한민국 시장경제사에 큰 획을 긋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회의는 우리 역사상 정부와 재계간 첫번째 공식모임이었다.

지금이야 대통령이 개별그룹회장도 따로 만나고 30대그룹회장들과 오찬도
함께 한다.

그러나 군림하는 스타일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사농공상의 도식에 젖어
있은 듯했다.

기업인들과 함께 국사를 논한다는 것은 자유당 시절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장총리가 기업의 대표들과 심야회의를 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큰 뉴스였다.

일제강점기간과 광복, 6.25동란 등 온갖 풍상속에서 정보력과 경영능력을
키워온 재계가 국가경영의 한 주체로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5.16 직후 박정희 정부가 각종 경제시책에서 재계의 의견을 대폭 수용한
데는 이 회의가 "전례"로 작용했다.

장기발전구상을 위한 실행준비가 갖춰진 것도 이 회의가 기점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면 총리와 경제각료, 재계인사들은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