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문제는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취약점으로 인식되어왔다.

팽창하는 기업과 반독점을 내세운 정부 규제는 물고물리는 숨바꼭질이었다.

그러나 "메가머저"물결이 이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

각국 정부는 어느샌가 반독점의 깃발을 슬그머니 내리고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응원석으로 자리를 옮겨앉고 있다.

시티코프와 트래블러스의 합병이 발표되자 미 법무부 독점금지 위원회는
놀랍게도 하루만에 OK사인을 냈다.

미상원 금융위원회 다마토 의장은 "차제에 금융 관련법을 대폭 손질할 것"
이라며 지원사격을 해주고 있는 정도다.

금융산업간 업무영역을 철저히 구분한 미국의 글래스스티걸법(34년)은
전세계 국가들로 퍼져나가 지금까지 세계 금융업을 규정하는 교과서로
통해왔다.

우리나라 역시 이를 받아들여 1금융권과 2금융권을 엄격히 구분해왔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60여년만에 미국 스스로가 이법의 철폐를 서두르고
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의 공정거래위원회도 반독점 규제를 미련없이
내던지고 있다.

일본 공정위는 지난 96년 미쓰이 석유화학과 도아추화학의 합병을
조건없이 승인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

수지원료인 페놀시장의 60%를 한회사가 장악하게 되는 메가톤급
합병이었다.

공정위는 이때까지만 해도 시장점유율이 25%를 넘어서거나 해당업계
1위인 기업의 합병은 예외없이 불허해왔었다.

세계시장의 통합은 국내시장에서의 독점 여부를 점차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는 오는 2020년께는 세계 유수기업중 각업종에서 대표기업
65개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연구보고서가 발표됐다.

세계적 규모의 M&A와 전략적 제휴가 확산되면서 엄청난 숫자의 기업들이
도태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지난해 미 보잉사가 맥도널 더글러스(MD) 인수를 추진했을 당시 발끈하고
나선 곳은 미법무부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유럽의 에어버스였다.

에어버스측은 "경쟁기업의 씨를 말리겠다는 파렴치한 욕심"이라며 보잉사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어댔다.

EU위원회도 반독점 기준을 들먹이며 이 합병을 반대하고 나섰다.

자칫 미.유럽간에 무역분쟁으로까지 치닫을 형국이었다.

미정부는 그러나 끝까지 보잉을 감싸고 돌았다.

독과점 방지보다는 자국기업의 세계시장 제패를 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반독점 규제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 법무부는 최근 방산업체인 록히드 마틴과 노드롭 그루먼사의 합병에
제동을 걸었다.

또 세계 최대 회계법인의 탄생을 예고했던 KPMG와 언스트&영의 합병계획도
불허했다.

EU위원회 역시 <>전세계 매출이 50억 ECU(53억달러)를 초과하거나
<>EU역내 매출이 2억5천만 ECU(2억6천7백만달러)를 넘는 기업의 합병에
대해서는 여전히 엄격한 심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반독점 규정들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 "경우에 따라서만
발동되는" 고무줄 규정으로 변해가고 있다.

국내시장에서의 독점문제를 문제삼기에는 세계 시장의 통합과 치열한
국제경쟁이 더욱 심각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그동안 협소한 국내시장에서조차 엄격한 독점기준을 적용해
왔다.

지금도 국내 30대 그룹이 영위하는 사업품목의 85%가 독과점 업종으로
지정돼 있어 더이상 움쩍할 공간도 없다.

이런 태도는 시장에서의 경쟁을 피하고 정부의 반독점 규제에 안주해왔던
경제계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시티와 트래블러스의 합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세계 지도가 어떻게
다시 그려지고 있는지 생각해야할 때가 왔다.

<김혜수 기자>

[ 미국의 10대 기업 (단위:십억달러) ]

<>.제너럴일렉트릭 : 자산규모 284.1
<>.마이크로소프트 : 자산규모 217.1
<>.코카콜라 : 자산규모 196.0
<>.엑손 : 자산규모 168.8
<>.시티그룹 : 자산규모 166.8
<>.머크 : 자산규모 158.1
<>.파이자 : 자산규모 133.5
<>.인텔 : 자산규모 120.9
<>.P&G : 자산규모 116.8
<>.월마트 : 자산규모 111.5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