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개국초부터 서울에 들어오는 요로 다섯곳에 상설빈민구조기관인
진제장을 설치하고 집없이 떠도는 유랑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세종때는 병자를 위해 그곳에 의원 1명이 파견돼 있었고 옷이 없는
자에게는 나라에서 옷까지 마련해 주었다.

지금의 동대문 밖에 있던 보제원, 이태원, 홍제원, 그리고 서민병원이었던
동.서 활인원에 진제장이 설치돼 있었다.

1437년(세종 19년)에 이곳에 수용돼있던 인원이 모두 2백75명이었다고
"세종실록"에는 기록돼 있다.

그무렵 전국의 인구가 6백70만명 정도였다는 추정치로 미루어 볼때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그뒤 가뭄 홍수로 인한 흉년이 몇해 걸러 한번씩 이어지고 외침으로 인한
전쟁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유랑인들의 수는 늘어가기만 했다.

그 대책으로 조정에서는 중종20년(1525) 기민구휼을 전담하는 진휼청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 기관은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의 3백70년동안 존속됐다.

어느 왕때를 막론하고 큰 흉년이 들 때면 굶주린 백성들은 서울로
몰려들었다.

이럴때면 으례 진휼청에서는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이고
양식을 조금씩 주어 시골로 다시 돌려보냈다.

이것은 조정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거리였다.

조선왕조의 긴급 구휼책이란 것은 이처럼 죽을 쑤어먹이거나 몇되박의
쌀을 나누어 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조정은 굶는 백성을 외면하지 않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역대왕들은 세종이 말한 것처럼 "나라는 백성들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IMF관리체제이후 역대합실이나 지하철역에서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여러종교 사회단체들이 이들을 돕고 있으나 서울시는 다음달부터 노숙자
들을 단속하겠다고 한다.

합숙소에 수용한다지만 이들중 대부분은 "복지"시설을 믿고 "빈곤"에
안주할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무조건 이들을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하며 하루속히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