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날마다 나오는 새 정권의 경제 정책들은 우리를 안심시키기보다는
걱정스럽게 만든다.

이같은 걱정은 새 정권이 본질적으로 시장 경제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듯하다.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시장 경제만을 추구하면,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처럼 참담한 좌절을 당한다고 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새
정권의 시장경제에 대한 태도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자연히 지금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개혁의 방향은 지도주의적(dirigists)
이고 처방들은 거의 모두 대증요법적이다.

시장 경제는 규칙에 바탕을 둔 체계(rules-based system)다.

경제 주체들은, 특히 기업들은 주어진 환경과 규칙들에 적응하면서 가장
효율적인 모습으로 끊임없이 진화한다.

반면에 명령 경제는 양에 바탕을 둔 체계(quantity-based system)다.

그런 사회엔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관료 기구가 따로 존재해서 모든 경제
주체들이 이룰 것들을 자세히 규정한다.

자연히 경제 주체들의 진화는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시장 경제에서의 개혁은 규칙들을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규칙들이 나아지면 경제 주체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행동하고 사회는
발전한다.

반면에 관리들의 자의적 지침은 시장 경제의 본질에 어긋나고 경제
주체들의 진화를 막거나 왜곡시킨다.

안타깝게도 지금 새정권의 경제 개혁은 규칙들의 개선이 아니라 관리들의
자의적 지침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대기업들의 부채 비율을 줄이려는 조치는 전형적 예다.

우리 대기업들이 빚을 많이 진데는 여러가지 까닭들이 있을 터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싼 자금이 많았다는 사정과 빚을 얻는 것이 자기 금융보다
쌌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 싼 자금은 없어졌다.

따라서 정부의 독려가 없더라도 기업들은 열심히 빚을 줄일 것이다.

만일 빚을 얻는 것이 유리하도록 만든 조세 제도가 바뀌어 자기자본과
타인자본이 같은 대우만 받는다면 빚을 줄이려는 노력은 훨씬 커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부가 부채 비율을 어떤 시점까지 어떤 수치 아래로 낮추라고
대기업들에 강요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조세제도와 같은 규칙들을 개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은 대기업들에 그런 목표를 강요하지 말아야 될 강력한 까닭들이 있다.

먼저 정부가 그렇게 강요하는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

자기자본과 타인자본의 비율은 기업들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정부가 그런 일에서 기업들에 자신의 판단을 강요하는 것은 시장 경제의
본질을 해친다.

그렇지 않아도 지나치게 큰 정부의 몸집과 권한이 우리경제를 어렵게 만든
가장 큰 까닭이 아닌가?

대기업들이 자금을 너무 많이 끌어다 썼고 게다가 잘못 투자했다는 질책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겠지만, 그런 질책과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대책은
별개의 사안들이다.

다음으로는 적절한 부채 비율에 관한 일반적 기준도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나라마다, 업종마다, 그리고 기업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같은
기업이라도 환경이 바뀜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게다가 자기자본과 타인자본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둘다 빚이며, 둘 사이의 근본적 차이라고 해야
자기자본이 타인자본보다 훨씬 장기적인 부채라는 점뿐이다.

자연히 정부에서 일률적으로 부채 비율에 관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은
기업들에 괴로움을 주고 경제에 해로움을 준다.

셋째 부채 비율은 기업의 건강을 진단하는 여러가지 지표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그리고 경영의 직접적 목표로 삼을만한 것도 아니다.

살아남기도 벅찬 기업들에 갑자기 부채 비율을 낮추라는 요구는 현실적
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무릇 개혁은 그것이 고르는 수단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시장 경제의 원칙에 어긋나는 수단들로 시장경제를 개혁하려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큰 문제를 남긴다.

개혁이 이루어진 뒤 명령 경제의 관료들처럼 행동하는 정부 기관들과
관리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 사라지기를 기대할 것인가?

새 정권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끈질기게 살아남는 정부 부문이다.

기업들의 부채 비율이 아니다.

아울러 시장 경제를 개혁하려는 이들은 조급해선 안된다.

시장경제는 규칙에 바탕을 둔 체계이므로 경제 주체들이, 특히 기업들이
새로운 환경과 규칙들에 적응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기를 기다릴줄
알아야 한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수치를 내놓고서 기업들에 따르라고 강요하는
관리들은 양에 바탕을 둔 명령 경제의 관료들처럼 선지자를 자임하는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