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협의회 창립 (하) ]]

한국경제협의회의 실제적인 활동기간은 4개월여에 불과했다.

반년이 채 못됐다.

개인이라도 큰 일을 도모하기엔 너무 짧았다.

단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우선 운영틀을 짜는데만 1개월은 걸린다.

지금도 경제단체가 사업하나를 꾸밀 때는 최소 서너달은 필요하다.

그래서 어쩌면 경제협의회는 창립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도 대표적인 기업인들이 일본의 경단련같은 버젓한 단체를 만들어
재계의 구심점을 마련했다는 것만 해도 뜻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차차 얘기하겠지만 경제협의회는 그 짧은 기간에도 우리나라
시장경제사에 큰 획을 그을만한 일을 많이 남겼다.

지금 내 앞에는 61년 1월10일 열렸던 경제협의회 창립총회의 의사록이 있다.

창립취지문을 읽어보자.

"현재 우리 사회에 조성된 모든 혼란과 불안은 극심한 경제적 위기를
휘몰아오고 있다.

낱낱이 만연되는 산업활동 위축과 실업인의 기업 의욕상실은 급기야 전면적
파탄으로 파급되지 않을까 적이 우려된다.

이러한 결정적 난국을 광구하고 그 재건발전을 담당할 역군은 바로 우리
실업계 인사인 줄로 확신하는 바이다"

요즘도 매일 신문지상에서 빠지지 않는 "경제위기"란 말이 눈에 띄어
씁쓸하다.

물론 당시는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 때는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정치.사회적 혼란까지 겹쳐 제대로 먹고
사는 것조차 어려웠다.

어쩌면 기업인들이 느낀 불안감은 지금보다 더 했을 것이다.

창립총회에서 이들이 밝힌 행동강령은 네가지다.

1)대동단결해 안정기반을 마련한다
2)기간산업 및 농어촌 진흥과 고용확대 방안 등에 대해 공정한 의견을
제시한다
3)공산진영과 대결해야 하는 현실을 직시해 자유진영과의 경제협조로 산업
개발과 실업자 해소 고용증대에 노력한다
4)정치 사회 안정이 경제성장의 기본조건 임을 강조하고 정쟁의 중지와
시정전반의 일대혁신을 촉구한다.

취지문이나 행동강령에서 이익집단(Interest Group)을 대변하는 어구는
하나도 없다.

그만큼 경제협의회의 동기와 목표는 순수했었다.

경제협의회는 첫 사업으로 절량농가와 도시빈민을 위한 구호양곡 거출에
나섰다.

또 실업문제 수출진흥 경제발전 구상 등 정책대안을 잇달아 내놓았다.

경제주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협의회의 이같은 노력은 비록 4개월만에 끝났지만 이런 전통은
한국경제인협회(68년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로 계승됐다.

또 60~70년대 박정희정부의 수출주도 개방발전 전략착상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사실 초기엔 발전 구상전략이 없었다.

특히 6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전적으로 한국경제인협회의 제안에
의존했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상세히 설명하겠다.

여기서 민간 경제계 역사를 약간 아는 사람들은 궁금한 점이 있을 것이다.

대한상의가 있었는데 왜 굳이 새로운 경제단체를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대한상의 내부에서도 옥상옥이라며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 문제를 푼 것은 송대순 상의회장이었다.

송회장은 국난타개를 선도할 강력한 경제단체 설립이 필요하다며 회원들을
설득했다.

사실 당시 재계에선 "약간은 격이 높은" 단체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땐 상의 회원 가운데 기업가라고 불러주기에
적당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일례로 이런 촌극도 전해진다.

총회장에서 발언하는 일부 회원들 중엔 "요즘 사업하는데 익로가 많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심심찮게 있었다고 한다.

애로를 읽을 줄 몰라서 생긴 일이다.

상의가 인원도 많고 전통도 있는 조직이었지만 당시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단체가 필요했었다.

물론 옛날 얘기다.

경제협의회의 창립은 당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창립총회를 전후해 도하 각신문들은 대서특필로 경제협의회에 격려와
기대를 보냈다.

"경제계 거물급 총집결" "창의혁신의 기틀마련" "경제난국 타개 역군 자부"
"경제발전에 선도적 역할" 등이 당시의 경제협의회 관련기사의 헤드라인이다.

민간 경제계가 이때만큼 온국민의 관심과 기대, 언론의 주목과 격려를 받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협의회는 결국 이해 5.16 군사쿠데타로 사라지게 된다.

5월22일 공포된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제6호에 따라 모든 경제사회단체들은
일단 해산됐다.

이후 경제협의회는 공식적인 해산절차를 밟기 위해 몇차례 운영위원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때마다 성원이 되지 않았다.

결국 8월5일에 가서 사무실이 완전폐쇄했다.

나중을 기약하기 위해선 회의 해산보다는 일단 정회로 해놓자는 감사들의
의견에 따라 그렇게 했다.

경제협의회의 문서와 사무집기, 그리고 조금 남은 재산은 나중에
한국경제인협회로 이관됐다.

당시 총부부장이었던 윤태엽씨는 "경제협의회는 우리나라 경제 근대화에
씨앗을 뿌린 수난의 개척자"라고 평했다.

적절한 표현이다.

경제협의회에 처음 던져진 수난은 "부정축재자 처리"문제였다.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