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은행의 여신심사절차.겉만 보면 국내은행과 다를게 없다.

신용보고서를 만드는 기초조사작업을 하는 것이나 여신심사위원회를 여는
것이나 그게 그거다.

외국인인 미셀리언 수석부행장이 의장을 맡는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

그러나 이 은행은 지난해 소나기같은 대형부도를 용케 피했다.

이에대해 "다른 은행처럼 심사위를 책임을 분산시키는 기구로 악용하지
않고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한 관계자는 그비결을 말했다.

국내은행들은 지난해초 한보사태이후 일제히 여신심사위를 만들었다.

외부 압력에 굴복해 여신결정이 왜곡된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장식물로 변했다.

J은행 여신담당자는 "미리 결론을 내놓고 꿰맞추는 회의가 됐고 알아서
기는 풍조도 여전했다"고 말했다.

상명하복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토론을 해봤자 결국 윗사람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은행이 클수록, 역사가 오랠수록 더 그랬다.

외압이나 윗사람 의중을 잘 소화하는 구조가 체질화됐다고나 할까.

제일 서울은행의 참담한 최후는 자업자득인 셈이다.

이런 은행들 때문에 일부 후발은행들은 득을 보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진다.

"한두번 압력을 넣지만 원칙을 까다롭게 따지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아예
연락도 안한다. 청탁을 잘 들어주는 은행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 은행을
슬쩍 소개해 준다"

요즘들어선 철저한 여신심사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외부공인회계사를 여신심사위에 참여시킨다든가 사업성심사를 강화하기
위해 이공계출신을 활용하려는 조짐도 있다.

부결되는 예도 간혹 나온다.

장기신용은행 하나은행처럼 거래기업 경영진및 노조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대출을 거부하는 곳도 등장했다.

감독당국도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에 제동을 걸고 있다.

2000년부터 부채비율이 2백%를 웃도는 기업에 대한 대출에는 특별대손충당금
을 쌓도록 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부실은행은 문을 닫겠다는 경고도 잇따른다.

그렇지만 체질이 바뀌는데는 고통과 시간이 더 필요할 것같다.

정치권과 관의 눈치를 살피는 습성이 여전해서다.

행장 측근들도 "새정부들어 달라진게 별로 없다"고 입을 모은다.

"외부 압력에 저항하라"는 김대중대통령의 주문은 "저항하면 죽는다"는걸
진리로 믿는 사람들에겐 너무 수준높은 기대일 뿐이다.

"백날 해봐야 정에 약하고 연줄 따지는 한국사람으로는 안된다"

"외부압력에 순응하고 내부 힘겨루기에 바깥바람을 끌어들이는 "기술"이
출세가도를 달리는 지름길로 통하는 풍토에선 악순환이 되풀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은행사람들이 들려주는 답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여신심사를 제대로 하려면 외부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외국)사람을
임원으로 앉혀야 한다"는 것이다.

< 허귀식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