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베를린필을 이끌고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섰을 때 카라얀은 76세의
노인이었다.

보행이 자유롭지 못해 보이던 카라얀은 그러나 지휘대에 오르자 완전히
달라졌다.

단원들의 태도는 더욱 놀라웠다.

현악기 주자들의 팔놀림 속도는 물론 각도까지 일정했다.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필의 상임지휘자를 맡은 것은
55년.

30년 가까이 호흡을 함께 해온 단원들은 카라얀의 작은 손짓 하나에도
놀라운 일체감을 보여줬다.

KBS교향악단은 56년 처음 만들어진 뒤 59년 해체와 61년 재발족, 69년
국립극장 산하 국립교향악단으로의 이관 등 우여곡절 끝에 81년 KBS교향악단
으로 재출범했다.

이후 17년동안 홍연택 원경수 금난새씨와 오트마 마가 등이 지휘봉을
잡았다.

현재 단원은 1백13명.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그러나 새출발 이래의 과제인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의 도약"을 걸고
맞았던 정명훈씨가 계약 8개월만에 사퇴의사를 밝히고 KBS가 이를
받아들이기로 함으로써 KBS교향악단의 앞날은 다시 불투명해졌다.

단 한차례의 정기연주회를 갖고 난 뒤의 일이다.

정씨는 94년 프랑스국립오페라단과의 소송을 끝내고 KBS교향악단
특별연주회 지휘차 귀국했을 때 "바스티유 사태때 무엇보다 큰 힘이 돼준
국민들의 성원과 지지에 음악으로 보답하러 왔다"고 말했다.

또 "그동안 바쁜 일정때문에 고국에 대한 기여는 머리속에서만 그려왔는데
마흔이 넘고 보니 개인의 공부나 화려한 경력쌓기보다는 한국음악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한가지씩 찾아나가고 싶다"고도 했다.

정식취임 4개월만에 "결별"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된 진짜이유가
무엇이든 양쪽 모두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닌가 싶다.

부지휘자 임명문제가 그토록 협의하기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세계적인 지휘자 기근상태에서 정씨만한 지휘자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씨 또한 KBS교향악단 지휘를 맡는 것은 자신이 누누히 강조해온 고국에
대한 기여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다.

정씨는 지휘자로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스승 줄리니의 얘기를 떠올린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뭐든지 시간이 걸리는 법이야"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2일자 ).